[장편/완결] S is... : 조반유리 . ** 글을 살짝 수정했습니다.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SM이라고 스스로 정의내리고..^^;..귀여운 SM 이 될꺼야..라고 가볍게 적은 글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에도 나오듯이..^^... S is...는 쉬어가는 페이지 입니다. 다른 글들이 완결나기 전에, 혹은 번외가 나오기 전에 그냥 한번.. 땅콩이나 맥주..-_-;..혹은 커피 등등과 함께 즐기실 수 있도록 적은 글입니다. S is...는 제가 생각하기엔..^^;.. 그냥 즐거운 시도였습니다만...이후 존재의 지속은 보장이 안되는..-_-;..글이 되겠습니다. *** sadism :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M.de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양성의 앨골래그니어(algolagnia)'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된다. 심해지면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되는데 이것을 음락살인(淫樂殺人)이라 한다.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S.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 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두산백과사전- 1. 열 네살 때부터, 김 진우는 사람의 마음을 고민했다. 사람의 마음에 그어진 여러 개의 경계선 중 하나, 그것의 실체를 늘 감싸 안았다. 그는 언덕 둔치를 달리는 호흡처럼 가파른 숨결을 사랑했고, 부드럽게 밀려드는 체온과 속살들에 울컥했다. 달칵.. 그리고 열네 살에서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들이 인간의 체온을 대신해 그를 채워갔다. 어릴 때부터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과 날카로운 직감력, 또한 가진 것을 절대 뺏기지 않는 강함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서늘한 눈동자에 비하면 18살 김 진우의 외모는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다. 날렵한 손끝처럼 잘 뻗은 콧날과 단호해 보이는 입술, 약간 그을린 듯한 생김새. 가끔 나른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의 담배가 힘차게 아래로 고개를 숙일 때까지, 진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차락.. 방 안에 걸린 커튼이 한번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마치 이 순간의 평화로운 정적을 믿기 어렵다는 듯, 바람이 치고 들어와 겨우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 때서야 진우는 미간을 들어 조용히 상대방을 쳐다봤다. 어느 한 순간의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하루 동안 이미 탈진과 허기로 지쳐버린 사람이다. 다만 상대방 역시 눈동자만은 지독하게 살아 있다. 절대지지 않을 것처럼 진우의 시선을 되받아 친다. 감정이 톡톡히 실린 그 시선의 주인공은 바로 이 서경이었다. 그는 진우의 한 학년 선배다. 「너..............원하는 게 뭐야........」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서경 쪽이다. 조금 당황한 것처럼 뒤끝을 흐리는 말투였지만, 눈길이나 입매만은 야무질 정도로 완벽해 보였다. 그 어감 나쁜 한마디 질문에, 진우는 살짝 미소를 띠고 말았다. 묶여 있는 서경이 하기에는 너무나 되바라진 발언이라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서경은 절대 얌전하지 못한 자세로 결박당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그의 매끄러운 피부는 속절없이 이 포획자의 시선에 드러나 있다. 묶여 있는 손목은 너무나 꽉 비틀어진 천조각 때문에 깊이 자국을 남길 정도다. 진우는 피식거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만능이라고 생각한 적도, 혹은 뭐든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원하는 것을 어떻게 손에 쥐어야 하는지는 능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소리도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일어난 그는, 셔츠 하나만 달랑 걸친 매끈한 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침대 위쪽으로 단단히 묶여진 손목이었다. 더군다나 서경은 그 상태로 벌어진 몸을 닫지 못한 채, 다리가 들려져 있었다. 감춰야 할 치부들과, 한번도 남의 눈을 타 본적 없는,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본 적 없을 곳들이 속속히 드러나 있다. 간신히 힘을 주어 닫고 있는 듯한 양쪽 다리를 확 벌리며, 진우는 웃는 것 같은 미묘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 원하는 게 없어. 」 잘 알잖아?..라고 웃는 얼굴을 내내 쏘아보며, 분통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서경이 하얗게 굳어간다. 수치심과 범벅된 듯한 당혹감을 내려다보며, 진우는 자신이 힘을 주어 벌려놓은 부드러운 피부의 안쪽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낙인을 찍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입맞춤이 허벅지 안 쪽을 파고들었다. 파르르 떠는 경련이 상대에게서 전해져 온다. 감질날 만큼 확연한 촉감이 애를 태운다. 물론, 진우는 서경의 손끝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노련한 책략가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 뿐이다. 처음에는 공포, 그 다음에는 달램. 그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오가는 마음의 줄타기가, 바로 사람을 길들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경에게 손 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 남자야.......... 」 자기혐오에 빠진 듯한 혼란스런 동공이 진우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주 짧은 순간, 진우는 애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웃는다. 마치 곤란함에 빠진 서경을 즐기는 것처럼 그는 짓궂은 시선이었다. 이런 표정을 지을 때야 말로, 이 서경을 가지고 싶게 만드는 순간이다. 그 걸 모르는 것처럼 불타는 듯한 시선과 난감해 진 붉은 표정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 서경이 김진우를 피하고 싶었다면 절대 이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아........그래.. ... 선배는 남자였지.......... 」 「............-!!!!!!!. 」 진우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서경의 떨리는 무릎을 꽉 쥐고 한계까지 최대한 벌린다. 작은 생채기가 났을 때의 사람처럼, 희미한 신음이 서경의 목 너머에서 튀어 나왔다. 그는 아마도 기묘하고 악몽 같은 행위의 시작을 떠올리는 것이 분명하다. 말도 안 되는 고집 때문에 일이 왜 여기까지 왔는가를 후회하고 있는 게 뻔하다. 그러나 김진우는 이 서경을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만...둬................... 」 조금 할딱거리는 것처럼 숨 찬 애원이 서경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진우보다 한 학년이나 높은 고 3의 이 서경. 이날 이때까지 별 걱정 없이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온 중산층 집안의 이 서경. 진우는 그 순간에 살짝 고개를 들어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이 미소하나가 얼마나 섬뜩한 사람의 마음인지 알 때도 되었는데, 서경은 휙 고개를 돌리며 낮게 욕설을 퍼부을 뿐이다. 「선배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서경이 일상의 틀을 깨고, 금기 중의 금기에 붙잡힌 이유는 분명 자신의 선택이었다. 따지고 보면 서경이 동아리 회장으로 있는 고등학교 영화부에서 김진우는 한 학년 후배고, 지독스레 반항적인 표정을 짓지만 말은 별로 많지 않은 조용한 녀석이었다. 그들이 졸업 작품으로 어떤 영화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이런 관계는 물론,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어느 한 순간에 반전되었다. 「아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미묘한 표정으로 서경이 진우를 피해 고개를 돌린다. 원래는 녀석의 냄새가 그대로 붙어 있던 진우의 침대였다. 그러나 지난 한 밤 서경 자신이 남겨 놓은 색스러운 향만이 이제 가득 신경을 짓누른다. 밤새도록 뭘 당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아마 진우는 다시 키스하는 척하며 정신이 몽롱할 정도의 약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묶여 있는 그대로 방치한 채 이 방을 걸어 나갈 속셈이다. 마치 어제 밤처럼 말이다. 역시,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부터 부드러운 입맞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으응..이라고 부들거리는 신음을 내뱉기도 전에 잔뜩 긴장한 복부를 타고 녀석의 입술은 가슴어귀 유두를 잘근 물어 씹는다. 저절로 숨을 들이쉬는 긴장감 때문에, 허리 아래가 빳빳하게 근육을 죄어간다. 「아..........」 탁한 신음을 삼키는 것처럼 문득, 녀석의 입술이 뜨겁게 얼굴을 막았다. 정신을 헤집어 놓는 것처럼 밀려들어온 팍팍한 열기는 반항해 본다. 그런 서경의 태도를 못마땅히 여기는 게 분명하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 녀석은 서경의 머리카락을 아플 정도로 세게 끌어당기며 파고드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치열을 쓰다듬는 교태로운 행각에 와락 눈물이 날 정도로 혼미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김진우라는 악마 새끼가 원하는 결과다. 「......」 툭..하고 키스를 끝낼 때쯤엔 결국 진우가 혀로 감아쥐며 건네준 알약이 입안으로 건너왔다. 눈물이 본능적으로 눈가에 맺히며, 분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녀석을 노려보지만 소용없었다. 웃고는 있지만, 미칠 것처럼 냉혹한 눈동자로 녀석은 서경의 부풀어 오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촉촉하게 흘러나온 두 사람의 타액이 열기에 범벅되어 타는 듯 뜨겁다. 필시 어제 밤에 입술에서 피가 떨어질 정도로 반항하면서도, 삼켜 버린 그 약기운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열도 채 떠나지 않았는데, 다시 몽롱할 정도의 열기가 위를 따라 천천히 가라앉는다. 「비겁자...」 알약을 삼키지 않고 점점 붉어지는 서경을 향해 진우가 힐난하듯 웃었다. 한 남자가 사랑에 흠뻑 빠졌을 때나 보여주는 이 감미로운 손가락 놀림과 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차가운 얼음덩어리처럼 서경 안에서 쌓여간다. 녀석은 그저 서경이 어서 알약을 삼키길 원한다. 울음이 터질 것처럼 잔뜩 열락에 젖어서 교미하듯 자신을 응시하는 것만 원할 뿐이다. 마치 성적인 도구인 양 온통 드러낸 몸의 치부들이 그것을 알려주며, 밤새 괴로운 듯 성적인 열에 젖어 신음을 던지는 자신을 즐거운 기색으로 바라본 것이 그 증거다. 꿀꺽.. 자신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서경의 목덜미를 따라 입맞춤이 짙어진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긴장된 침과 알약이 식도로 넘어갈 때까지, 그 집요한 희롱이 지속되었다. 겨우 약이 넘어갈 때 쯤에야, 목을 묻은 채로 진우가 키득거린다. 「관객은 준비 되어 있고...」 그리고는 눈물이 흐를 만큼 분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서경을 향해, 또 그 사랑스럽다는 듯한 나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가 끝이다. 미묘하게 허벅지 안쪽을 들락거리며 애널을 조금씩 풀어 놓는 참을 수 없이 간질간질하고 이상한 감촉도 여기까지가 끝이다. 진우는 교복 셔츠를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어제보다 조금 더 굵어진 듯한 모조 페니스를 손에 들고 다가온다. 그 순간, 움찔거리며 바싹 소름이 돋는 서경의 아름다운 피부 위로, 녀석은 다시 서러울 만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연기를 해야지,이제..」 비디오의 on 버튼을 누른 채로, 진우는 바이브레이터의 손잡이를 쥐었다. 전원을 당기면 진동하기 시작하는 이 물체는 서경 역시 태어나서 어제 처음 본 것이었다. 그 동안은 말로만 듣고, 친구 녀석들이 잡지나 가져올 때 보며 희희덕 거렸을 뿐, 설마 자신이 겪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일이였다. 애원과 분노, 서러움과 수치감,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힌 둥근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우가 천천히 벌려진 다리 사이로 허리를 숙인다. 「싫어..............」 싫다고 한들,들어줄 인간도 아니겠지만.. 꽉 닫은 눈꺼풀에서 드디어 눈물이 밀려 나왔다. 이런 거 싫다. 너무 너무 싫다. 머리가 탈 만큼 색스런 성욕에 사로잡혀 동물처럼 헐떡거려야 하는 자신이 싫다. 그런 모습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안 해본 스스로를 견뎌야 하는 게 싫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마치 정말 관객처럼 즐겁게 구경하고 관찰하는 저 녀석을 잘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다. 「선배가 싫다고 하든, 좋다고 하던 나는 상관없어.」 푹..하고 뒤로 힘차게 들어오는 이물질의 느낌에 묶여 있는 몸이 반응하듯 역하게 휘어졌다. 고통과 충격으로 꽉 막힌 비명이 서경에게서 튀어 나왔고,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허리 아래로 휩싸인다. 무릎이 꺾여진 채 들어 올려진 다리 때문에 삽입된 부분이 녀석에게 확연히 드러났다. 녀석은 마치 정말 무대처럼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켜서 교묘하게 그 부분만을 비추고 즐길 것이다. 그리고 캠코더에서 녹화의 빨간 불이 들어온다. 두려움과 패닉으로 다시 허둥거리기 시작한 미끈한 몸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악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든 싫든, 이게 내가 원하는 거니깐. 선배가 죽을 만큼 싫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 죽을 만큼 싫은 감정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이 순간..은.. 내꺼니깐.」 그리고 이내 머리가 둥둥 울리고, 관자놀이가 지끈하게 아려왔다. 곧 한기처럼 속속한 열이 미친 듯이 피부를 아프게 두들길 것이고, 말초신경만을 자극해 되는 이 낯 뜨겁고 동물 같은 쾌감에의 굴복이 시작될 것이다. 주르륵.. .. 진우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커다란 서경의 시선에서 급기야 눈물이 흘러 나왔다. 털썩..마치 덫에 걸린 날짐승의 아름다운 깃털이 눈부시게 아래로 수직하듯, 서경의 머리카락이 체념 가득한 움직임으로 침대 베개를 향해 차르륵 펼쳐진다. 스스로 추락하는 것과 낙하하는 것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2. 서경은 영화 동아리 소속 회장이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초점 없이 책상 아래를 내려다보는 서경이었다. 친구인 수완이 연필 끝으로 서경의 금테 안경을 툭툭 친다. 녀석의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졸업 작품으로 내 놓고, 대학 실기에 내 놓을 장면이여서 긴장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멍하고 창백해 보인다. 「어디 아프냐, 이 서경?」 걱정스런 질문에 서경이 응답하듯 고개를 반짝 치켜들긴 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멍하다. 수완은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며 턱을 괸다. 마치,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깨 너머의 뭔가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녀석의 시선을 쫓아갔을 때, 딱히 주의를 기울일만한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까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자신과 서경,그리고 책들과 필름, 비디오 데스크, 컴퓨터.. 이런 기기들만 있는 동아리 실에서 계속 이 상태로 뭔가를 쫓든 허공을 향해 눈동자를 고정할 뿐이다. 「너 왜 그래? 지난주까지 진우 녀석이라 가학성과 피가학성에 대해 좇나 이빨 부서지게 떠들더니.. ... 오다가 폭탄이라도 맞았냐?」 「....-!!!!!!!」 조금 안색이 질린 표정으로 서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열어 놓은 교실의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서경은 잠시 수완의 얼굴을 들여다봤을 뿐이다. 그리고는 이내 갑갑한 것처럼 교복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건다. 살짝 푸는 그 모습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음..이라고 수완은 여전히 말없는 서경의 얼굴을 훔쳐보며 턱을 쓸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가라앉은 모습을 띈 적이 있는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혹은 두려움이든 즐거움이든 사로잡힌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 서경은 조수완이 떠올리는 한, 4살 때 시소를 타다가 운 것 빼고는 두려운 것이 거의 없는 놈이다. 지난 주 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겨울 영상 콘테스트 때문에라도 이 녀석은 이렇지 않았다. 대학도 물론 걱정했지만, 가장 우려했던 것은 콘테스트였고, 그래서 녀석은 누구 말마따나 머리털이 쏙 빠지도록 열성적으로 영화 준비에 매달렸었다. 2 학년 후배 김 진우가 시나리오를 맡았고, 명색이 동아리 부장이었던 이 서경이 서포트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둘은 벌써 이 영화의 제목을 정하는 일에만 두어 달을 싸웠다. 물론, 주로 논리적이고 명석하게 진우를 공격했던 것이 이 서경이고, '영화는 영화만으로.'승부하자고 온화하게 미소 짓던 것이 바로 김진우였다. 진우가 써온 시나리오는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고등학생들이 찍기에는 무리가 있는 몇몇 장면들과, 또 어딘가 퇴폐적이고도 간접적 철학이 난무하는 시나리오였다. 서경은 단호하게 '안돼'라고 말했고, 그에 비해 같이 3년을 영화 찍기에 골몰해온 수완은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진우와 서경의 부단한 싸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없이 이를 드러내고 씩씩거리며 싸우거나 주먹질을 오가지는 않았다. 진우 녀석 정도의 덩치면 능히 한 대 패고 싶을 만큼 얄미운 구석도 많은 선배들일텐데, 기합이 잔뜩 들어간 학년 간의 규칙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는 꾹 참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서경을 어떻게든 달려려고만 했었다. 그것이 수완이 알고 있는 지난 주 금요일까지의 상황이었다. 3.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서경은 자신이 일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완이 뭔가를 이야기하고 동아리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척추의 말미가 끊임없이 욱신거린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진득한 통증이었고, 아릿한 날카로움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으응..........」 불분명하게 울린 신음이 신경쓰였나 보다.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앞서가던 수완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 아픈 거 아냐?」 사색이 되어 버릴 정도로 복도 벽을 짚고 선 서경을 향해 녀석이 걱정스레 묻는다. 몇 명의 친구 녀석들이 왁자지껄 시끄럽게 어깨를 쳐대며 인사하는 상황에서도, 서경은 웃는 듯 마는 듯 찡그리고 있다. 그는 지금 묘하게 안개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김진우라는 한 학년 후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서경 자신이 자초한 행동이다. 진우가 제안을 했고, 자신이 동의를 했다. 그 빌어먹을 시나리오 하나에 그냥 져 주고 넘어갔으면 끝났을 일인데, 천성적인 호기심과 고집 때문인가... 이제는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서경은 아직도 자신을 조심스레 관찰하는 수완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젓는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돌아가는 신호였건만, 수완은 고개만 갸웃거리며 팔짱을 꼈다. 노란 병아리 모자 쓰고 유치원 시절부터 깔깔거리던 친구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둘의 묘한 신경전은 문제의 주인공 진우가 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어디 아파요, 선배? 제가 모시고 갈게요.」 퍽이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가서는 여느 때의 김진우였지만,... 녀석이 시야에 들어설 때부터, 서경은 이미 혼미한 정신으로 허둥거릴 뿐이다.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기분이다. 사람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모든 것을 영화 장면처럼 초월해서 바라본다더니...딱 그 짝이었다. 입술이 저절로 말라붙었고, 달싹이는 숨결마저 자신이 아닌 것 같다. 수완의 존재는 이미 머리 속에서 하얗게 떠나간다.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을 이런 극한 감정과 상황으로 밀어 넣은 악마 같은 후배에 대한 허망함.. ... 신기하게도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허탈과 허무함 뿐이다. 「거 참..」 보통 때라면 서경이 진우의 예의바른 인사에 그냥 미소 짓거나, 혹은 보자마자 칼칼하게 시나리오 문제를 걸고 넘어졌을 텐데, 희한할 정도로 조용히 굳어 버린 모습을 보며 수완이 혀를 찼다. 「............」 이제 고 3이 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청명한 봄날의 공기가 온 몸을 기막히게 풀어 헤친다. 서경은 수완을 뒤로 한 채, 말없이 진우가 잡아당기는 팔꿈치에 의존했다. 약간 이를 가는 듯한 표정 이였지만, 어디까지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려는 마음이 절실하다. 「양호실에 갈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섬뜩하게 몸이 떨렸다. 이틀 동안 이 상태로 지속된 저음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떤 짓을 했는지 기억하는 몸이었다. 자신에게 잡혀 있는 팔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을 녀석인데도, 여전히 가면을 쓴 사람처럼 호감 가는 얼굴로 내려다본다. 「아니.」 이 녀석과 S 에 대해 논했었다. 누구나 '자신이 다 컸다'라고 생각한다는 어떤 오만한 시기가 있다던데.. 아마, 그 느낌이 서경에게는 열아홉에 찾아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제 두 어깨위의 고개를 빳빳이 쳐들어도 좋을 나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존경하기까지 하는 어린 후배들과, 그리고 절친한 친구 녀석들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따뜻한 가족들. 딱 거기까지면 별 걱정 없이 살아온 일상들이다. 이 녀석과 S 에 대해 탁상공론 같은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어느 봄날의 주말이 자신을 뒤흔들기 전까지, 서경은 인생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광기나 폭주 혹은 비정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가지지 못한 인간들의 삐뚤어진 근성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는 정말 사람을 믿는 편이었다. 이렇게 48시간의 기억으로 19년의 가치가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이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다시 S에 대해 논해 볼까요?」 「아니!」 그 대답은 보다 본능적으로 튀어 나왔다. 너무나 빨리 튀어나와서 스스로도 입술을 꽉 깨물 지경이다. 놀란 마음 때문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혈관이 터지는 기분이다. 이제는 시나리오건, S 건 생각에 떠올리기도, 혹은 입에 담기도 싫다. 그 것은 의식적으로 판단할 여력도 없이 그냥 감각적인 방어다. 「그러니깐,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나는 새디스트라고...」 「............」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서경에게 보조를 맞추며, 진우가 말했다. 꼭 '나는 학생이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억양과 목소리다. 과잉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악랄할 정도로 편안한 목소리 때문에 서경은 이를 악 문다. 조용한 광기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어쩌죠,..선배....」 측은하다는 듯 혀를 잠시 차며, 미혹적인 저음이 웃음을 띤다. 서경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바라본 채로, 그는 서경의 교실 뒷문에서 재빠르게 귓속말을 한다. 저속한 신음처럼 내려앉는 목소리는, 행여 누군가 듣지 않을까 싶게 서경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아직도 그저 뿌연 장막 속에 갇힌 기분일 뿐, 이성적인 판단 같은 것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독할 만큼의 약 기운이 몸에 남아 있기도 했고, 비록 직접적으로 성행위를 했다든지 혹은 레이프를 당했던 것도 아니지만 절절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몽롱할 것처럼 자신만의 의식 속으로 잠겨드는 서경의 멍한 시선을 훔쳐보며, 녀석이 귓전에서 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손살같이 서경의 귓볼을 혀를 핥는 듯, 빨아들이며 촉촉이 속삭인다. 「나는 선배를 공개적으로 망쳐 놓을 수도 있어.」 「-........!!!!!!!」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겨울처럼, 싸늘한 바람이 늑골을 통과하며 오싹하게 만들었다. 1. '나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가지고 있어요. 부정하지 않습니다.' .. 라고 녀석이 말했다. 밤 1시가 넘어서 까지 의식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한적할 정도로 조용한 침묵 속에서도 녀석의 목소리가 쟁쟁히 울렸다.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피로함과 동반된 열을 식히려 애쓴다. . 감은 시야 속으로도, 진우 녀석과 했던 의미 없는 논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텅 비어 버린 이성과 자각의 두뇌 속으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교차 편집처럼 번쩍거리며 지나간다. '나는 광기를 가지고 있고, 파괴하고 싶을 정도의 소유욕도 가지고 있고, 인간에게 허용된 모든 감정은 다 가지고 있어요..' 아마 서로 격렬할 정도로 논쟁을 벌이던 와중이었던 것 같다. 도저히 서경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진우도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양 손을 치켜들었다. 그 때, 녀석은 아마 반쯤 포기한 것처럼 담배를 물더니 피식거렸다. '나는 아냐, 김 진우. 물론, 영화는 2시간 동안의 환상이고, 장면과 씬의 커뮤니케이션일지 모르지만,..아무튼 나는 아냐. 보편적인 모럴(*morals - 도덕)을 중요하게 생각해.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 대중적일 수는 없어.' '그럼 선배는 지금까지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셨어요?' 마치 모욕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진우는 그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서경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한다. 영화를 좋아는 하지만 과도한 실험을 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대중적인 게 뭐가 나쁘지?' '그럼,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건 뭐가 나빠요?' 그 말은 서경에 대한 삐딱한 공격이었다. 서경이 진우의 시나리오를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내용으로 점칠 된 자기위안의 수단'이라고 비꼬인 것에 대한 반격이다. '니 영화가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라서 찍지 말자는 말이 아니잖아, 지금?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라는 의미야. 심사위원들과 대중들이 설득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적인 감정을 삽입하라는 의미야. 성적인 코드도, 혹은 기발하고 특이한 캐릭터들도 다 좋아. 성(性)을 썼다는 걸 나무라는 게 아냐. 어느 선까지만 지켜달라는 거야. 지금의 네 시나리오는 오직 너 혼자만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이야.' 마스터베이션은 자위를 의미한다. 혼자서 즐기고 혼자 만족을 느낀다는 의미의 이 신랄한 비난도, 그러나 둘 사이에서는 끄떡없는 화살이다. 그런 한마디의 비꼬임으로 포기할 김진우가 아니다. 이 서경도 마찬가지다. '내 시나리오가 나 혼자 하는 딸딸이다 이거군요. 그래...좋은데요.. 근데, 마스터베이션이 뭐가 나빠요?' 진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의 당혹감이 떠오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 냉정한 말투였고 표정이었지만, 필시 그 단어를 입에 담은 서경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막상 영화 평론을 공부할 때보다 더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글로 그 단어를 썼을 때와는 다르게, 직접 입으로 튀어나온 단어는 극히 외설적이다. 진우가 웃으며 비꼬는 입술로 같은 발음을 꺼내는 순간, 지독하게 도발적인 단어로 전락해 버린 거다. 서경은 그 순간에 발끈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영화를 퇴폐적으로 만들 생각인지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김.진.우.' 녀석의 이름을 똑똑히 발음하고자 애쓰며 서경이 눈을 반짝였다. '마스터베이션이란, 김진우.. .. 무릇, 혼자 집에서 문을 잠가 놓고, 이불 위에 들어가서 몰래 몰래 하는 비밀스런 손가락질에 지나지 않아.' 목까지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이야기 했지만,.... 진우가 힐끗 웃는 순간, 또 머리 속에 불이 인다. 이번에는 비웃음보다 더 크게 입가를 실룩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두 주먹을 책상 아래에서 꽉 쥔 채, 교과서적인 말을 늘어놓는 서경에 대한 폭소였으리라. 그리고는 불쑥.. 진우는 팔꿈치를 책상 위에 댄 채, 미끄러지듯 앞으로 뻗어왔다. 애써 냉정한 서경의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를 의식한 기색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흔들 찰나를 기다리는 적군의 얼굴이었다. '순진하시고 순결하신 이 서경 선배님.. 내가 이러니깐 선배를 좋아한다 이겁니다. 선배님은 어디 성문제 연구소에서 나오셨습니까? 누군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해보셨죠? 거 보세요. 마스터베이션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데만도 벌써 입술을 세 번이나 떨었어요.' 그리고는 음산하게 목 뒤에서 크큭 거렸다. 책상 앞쪽으로 미끄러지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진우와 얼굴이 부딪칠 거리까지 가고 말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필사적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잘난 척을 한다고 스스로 꺼낸 말 때문에 갑자기 위가 뒤틀릴 기분이었다. '여자랑 자 본 적 있어요? 없죠? 남자랑은요?'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요사이 남학교에도 불고 있는 야오이 바람 때문에 많은 수의 남학생들이 호기심을 가지거나 반발하곤 하지만, 서경 자신은 그런 문제에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고, 서경과 진우가 다니는 남학교에서도 그런 일은 그저 치기어린 농담과 야유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열여덟, 열아홉이나 된 녀석들이라면 새로운 것에 흥미를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호기심에서 그친다. 더 깊이 알수록 '으웩'하며 뒤를 돌아서거나, 혹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은 그냥 매스컴에서 떠드는 한줌의 가십과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서경은 자신처럼 다른 인간도 의례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남들도 다 자신과 생각이 똑같다라고 느끼는 게 덫이라는 것을 훨씬 뒤에 깨달았지만 말이다. ' 이런 단순한 질문에도 당황하잖아요, 선배님은.. 나요? 난 솔직히 말해서, 보고 싶어요. 선배가 자위를 하는 것도 보고 싶고, 다른 사람과 성행위 하는 것도 보고 싶고, 여자든 남자든 앞으로 하던 뒤로 하든..자극적인건 해 보고 싶어요.' '너!!!!!!!!!!' 얼마나 여유만만하고 나른하게 이야기 하는지, 서경은 벌떡 일어서며 진우의 얼굴을 때릴 기색이었다. 그 때서야 녀석은 몸을 뒤로 천천히 빼내며 다리를 일으킨다. '해 보고 싶다고 말했지, 한다는 말은 안 했어요. 그게 선배와 나의 차이점이예요. 영화는 2시간 동안의 환상이란 말입니다. 영화는 실제가 아니에요. 실제 같은 영화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목표로 했던 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니깐요. 내가 인간의 마음을 영상화하고 싶다는 것에 왜 선배가 그렇게 길길이 날뛰는지 모르겠습니다. 해 보고 싶다는 것이 지금 당장 하겠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사람이면 누구나 뒤틀어지고 기묘하게 괴리된 감정들을 안고 살아가요. 실현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느 순간의 통찰력과 분별력이 제어하는 것뿐이죠.'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킬러를 보고 실제로 사람을 재미삼아 죽인 녀석들이 둘이나 있어.' 서경도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르르 떨며 소리쳤다. 진우 역시 약간 감정이 뻗어가는 것처럼 무겁고 진지하게 맞받아친다. '킬러라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재미삼아 다른 사람을 죽이진 않아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본 사람들이 모두 그 주인공처럼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 그 소설이 고전 중의 빼어난 작품일 이유가 없지 않아요?' '배우들은? 니 영화의 배우들은? 그리고 너나 내가 뒤집어 쓸 오명들은? 이제 열아홉의 영화감독이 찍은 영상이 동성애 코드를 가지고 있다면, 모두가 나를 동성애자로 의심할 거야.' '그건 또 뭐가 나쁩니까? 배우나 감독은 자기 생각 없답니까? 세상의 얼마나 많은 배우가 자기 배역에 사로잡혀서 실제로의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지경까지 가겠어요? 만약 어떤 영화의 연기를 통해서 자신의 모르는 점을 발견하게 된 거라면 몰라도...' 점점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보통적이고 상식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데는 아주 아연 질색할 노릇이다. 어지러운 동아리 방을 한번 휘휘 둘러보며 전의를 가다듬는 동안, 진우가 교복 상의를 집어 들며 뒤를 돌았다. '모든 사람들이 가학적인 면과 피가학적인 면을 가지고는 있어요, 선배. 누군가에게 '안 돼'라고 말할 때 더 많은 쾌감을 느낀다는 건 과학적인 결과로 나타났어요. 그것을 어떻게 인생에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그런 괴롭히는 감정과 다른 감정들과의 조화에 따르는 것뿐이죠. 정말 고집스러울 정도로 미련하군요, 선배님은..' '난 아냐.'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세요?' '설령 그렇다 해도, 괴롭힘에 동의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이야.' '해보지도 않고 뭘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해요?' 아마 그 뒤에 진우가 씩 웃으며 뒤로 돌아보지 않았다면, 금요일의 논쟁도 여느 때처럼 조용히 잠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진우는 그 순간에 정말 화가 난 것처럼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지만, 녀석이 결코 웃는 기분이 아니라는 것은 눈빛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어 왔다. 격한 감정들이 서경의 눈동자와 녀석의 눈동자 사이를 한바탕 기류처럼 뒤엉켜 지나갔다. '고작 자위라는 단어를 말하면서도 떠는 주제에...'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다. 논의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비웃고 공격하는 비겁한 도발이다. 그리고 서경이 머리가 확 돈 것처럼 녀석을 향해 노트를 던진 것도 딱 그 때 일이다. '안 해봐도 알아,이 개새꺄..' '그럼 내기하죠. 선배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가학성이나 피가학성이 없다면 나도 깨끗이 손 털게요. 대신 선배가 원하듯 대중들이 뻑 갈만한 요소로 만들어진 영화를 내 놓죠. 그렇지만, 선배도 내면에 뭔가의 욕망이 숨어 있다고 판단이 든다면...선배가 양보해요.' 어떤 미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게 실수였을까. 혹은 너무나 자신의 실체에 대해 자신했기 때문일까. 그 순간 서경은 문득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확고한 모럴관념과 가치관이 무너질 리는 없고, 이 듬직하고 강인한 녀석이 스스로의 한계와 판단착오를 인정한다면 무척이나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김 진우? 내가 새디즘이나 매조히즘을 가지고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내가 그걸 느꼈는지 아닌지 니가 무슨 수로 알겠어?' '아..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지금도 눈앞에 선 한 그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결코 포기라고는 모를 듯한 집요한 눈초리가 떠오른다. 녀석은 서경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던 것이다. '전혀 걱정 않으셔도 돼요. 나는 주도면밀하고.. .. 내가 테스트 할 꺼니 깐, 선배는 거짓말 하지 못해요.' '.........-???' 그렇게 주말이 다가왔었다. 아마 서경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이틀이었던 것 같다. 약을 먹고... .......아니면 그냥 살짝 미쳐서......... 녀석의 침대 위에서 모든 난잡한 신음을 다 뿌렸던 것 같다. 세상에........그것이 녀석의 테스트였다. 믿을 수 없다. 3. 진우의 시나리오는 'S is...'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무엇을 의미하는 S 이었는지 물은 적은 없지만, .... 서경은 녀석의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그 S 가 새디스트의 약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S is... 에서 주인공은 고 2의 두 남학생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서경이 이해할 수 없는 성적인 내용들과 대화들이었다. 두 남학생 중 하나가 용돈을 벌기 위해 소위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는 원조교제를 선택하고, 다른 남학생 하나가 그런 녀석을 돈으로 산다는 비정상적인 내용도 그러하거니와 두 녀석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온갖 일탈 행위들을 일삼다가 종국에 가까워 졌을 때는 급기야 연애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슈를 정면으로 영상화 시킨다는 감각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매력도 있었다. 문제는 연애감정을 표현하는 영상 언어적 장치가 성적인 장면들이고, 다분히 가학적이라는 것이다. 진우의 시나리오에서 녀석들은 서로 병을 던지고, 유리칼로 손목을 긋고 그리고 마치 전쟁처럼 키스한다. 그건 말이 안 된다. 하기 싫다는 걸 억지로 하자고 우기는 주인공 하나도 그렇지만, 그걸 수용하고 거기다가 쾌감까지 간다는 설정도 그렇다. 사람이 연애를 하고 사랑을 느낄 때는 필수적인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진우의 글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도구는 매우 격렬하다. 격렬하다 못해 다분히 새디스트적이다. 한마디로 서경이 그 시나리오에서 얻은 결론은..... '매우 충격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너무나 원색적인 나머지 중급의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영상 콘테스트에 제출할 16mm 치고는 심하게 쇼킹하다. 그래놓고는 주인공 둘이 서로 '사랑했다'란다.. ... 한마디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많았다. 지난주의 그 충격적인 경험도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몽롱하고 멍한 정신으로 일주일이 지나고 또 다시 녀석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자신이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 서경은 차라리 들짐승에게 잡혀가면 더 나을까..라는 망상까지 꾸고 말았다. 진우 녀석의 빈 집으로 들어서며, 서경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교복 넥타이를 풀었다. 어떻게 하면 미로 속을 헤쳐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막막할 정도의 기분이 막 뒤섞인다. 마치 열심히 운전하고 있는 사이에 핸들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후의 기분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까닭에 그저 폭주할 수밖에 없는 파국의 결론....그 오싹한 그 두려움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이런 상태에서 쾌감이라니..진우 녀석이 틀렸다. 그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니면 자신이 미쳐가는 중이거나 말이다. 「비디오를 보면..」 「-........!!!!!!!」 들어서자마자 본 것은, 녀석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들여다보는 모니터였다. 다시 둔탁한 흉기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게 울린다. 커튼이 짙게 쳐진 녀석의 집 거실로는 틈새의 빛만이 조금 들어왔다. 그러나 빛의 무게와 상관없이 저질스러운 흐느낌과 화면들이 똑똑히 보인다. 「왜 고개 돌려요? 선배잖아요?」 「-.......」 끈적거릴 만큼 확연치 않은 흐느낌이지만, 불쌍할 정도로 신음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다. 그것도 차마 눈뜨고 보기 싫을 정도의 자세다. 바로 온통 수치감과 굴욕감이 지배할 정도의 적나라한 자신이다. 태연자약하게 커피를 마시며 들여다보는 녀석의 의도에 화가 치밀었다. 디돌인지 바이브레이터인지, 그 망할 놈의 기구는 실제 보다 더 경악스럽다. 새디즘을 시험하겠다는 게 자신을 여자처럼 사용하겠다는 말인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깐, 저런 녀석에게 묶인 채로 저렇게 될지 몰랐던 것이다. 지랄 같은 이유로 이 녀석을 죽이거나 영원히 입 닫게 만들 수도 없다. 자신의 입으로 똑똑히 말했지 않은가. 이서경은 모럴에 강하고 윤리적인 인간이라고..거기에다가 인간에 대한 신념은 또 얼마나 강한가! 「기구 때문에 사정하고 싶었죠?」 「...............」 서경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녀석에게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았다. 사실은 아직도 앉을 때마다 욱신거리지만, 생각보다 훨씬 빨리 회복 중이다. 그 때는 녀석이 미처 뭘 삽입했는지도 모르게 강렬한 충격이 뒤를 파고든 것이다. 물론, 녀석이 그곳에 바른 약과 입안에 밀어 넣은 약 때문에 버텼지만 말이다. 약발이다. 까놓고 말하자면..어떤 미친개가 물어뜯어 놓고 병에 걸려 약발로 감수했던 것뿐이다. 「아, 약발 때문이었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은 사람 좋은 척 행세한다. 그러나 눈빛만은 매섭게 자신을 관찰중이다. 서경은 말없이 시선을 피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 날 부터인가 진짜 영화처럼 기차가 궤도를 벗어났다. 이제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기차는 탈선한 채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과정은 모르겠다. 머리 속에는 결론만 생생하다. 이렇게 가다가..어느 순간에 쾅-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삶은 폭발한 채, 비극적인 결론을 맞는다. 그 전에 얼른 저 비디오테이프를 압수해야겠다. 녀석이 16mm 로 찍어 컴퓨터로 작업한 파일도 남아 있을 터이니 그것도 지워야 한다. 「이리 와, 이 서경..」 그리고 녀석이 마침 때를 만난 것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불렀다. 건방진 새끼..비겁한 것은 녀석이다. 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뻔하게 반말을 찍찍 내 뱉으며 거만한 표정 그대로 이름을 부른다. 서경은 한숨을 쉬며 마치 끌려가는 기분으로 다가섰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의 손목을 휙 잡아당길 때가지 숨이 벅찰 정도의 살기(殺氣)가 자신을 에워쌌다. 「조교(調敎)가 뭔지 알아?」 「.......」 고집스러울 정도의 침묵이 서경을 지배했다. 뇌가 아플 정도의 살의와 분노 때문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저주감 때문이었다. 이 녀석은 처음부터 자신이 새디스트라고 말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괴롭힐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자신은 관념적으로만 그 단어를 알고 있지만, 어쨌든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 「조교라는 건 말이지, 선배.. 머리 좋은 선배니깐 잘 알고 있겠지만, 마치 짐승처럼 사람을 길들이는 거야. 개 목걸이를 해서 네 발로 기게 만들고, 주인 앞에서 용변을 보게 만들고,.. ... 정말 노예처럼 만들어서 성적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거지.」 「.....-!!!!!!!!!!!.」 「상대방에게 극심한 공포를 주는 거랑 같은 거예요. 살아남고 싶다..혹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리거나 수치감을 주는 거죠. 사람이라는 건 이상한 동물이여서...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극단적인 방어로 황홀감을 느끼다고 하더군요. 조교는 그런 겁니다, 선배. 선배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감정의 노예로 만드는 거라고 하던데.. 결과적으로 살아남고 싶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그 가해자가 친절하게 나오게 되면 정신없이 그 친절함에도 사로잡혀요. 선배라고 그런 심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동물조차도 그렇게 되는데?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어요?」 그 순간 서경은 필사의 힘으로 진우의 가슴을 확 밀어 냈다. 입고 있는 녀석의 스웨터 앞 쪽에 손자국으로 구겨질 정도의 힘이었다. 아마 너무나 놀란 나머지 취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 정신적인 패닉은 녀석 앞에서 발가벗겨지고 천박한 비디오의 여자 주인공처럼 묶인 채 사정감으로 할딱였던 때보다 더 극심했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녀석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내기가 미끼였고, 비디오가 빌미로 된다 한들, 절대로 네 발로 길 생각도, 혹은 그 앞에서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할 마음도 없는 서경이다. 녀석이 천천히 꺼내는 한마디가 영화 속 장면처럼 뇌리를 스쳐갔고, 마지막 순간에는 거의 토악질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이래서 선배가 순진하다는 겁니다, 이 서경 선배님..」 또 한번 녀석이 그런 서경을 보며 웃는다. 심하게 뒷걸음치며 도망갈 여지를 찾는 서경의 팔을 휙 휘감아 잡아당긴 채, 녀석은 언젠가 보았던 위험한 미소를 짓는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깝게 얼굴을 마주하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내게 괴롭히는 취미가 있다는 걸 잊으면 안돼요.. ... 선배가 싫어하고 저항하는 표정을 지을수록 더 그렇게 하고 싶으니깐..」 4. 진우는 실룩이기 시작하는 입가를 감추지 못하며, 결국에는 크게 파안대소 하고 말았다. 우렁차게 울리는 웃음소리 때문에,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더욱 서경을 물들어 간다. 바르르 떨 정도로 긴장한 얼굴이 바싹 눈초리를 올려 세웠다.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기색은 아니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신경은 많이 느슨해 진 것 같다. 「푸하하하하...」 「......-???」 「농담이에요, 선배. 선배가 하고 싶다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 해요? 혹시 내심 기대하고 있었어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크큭거리자, 그에게 어깨를 잡힌 서경의 하얀 얼굴이 점점 본색으로 돌아왔다. 조교(調敎) 라니... 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안 든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진우 본인은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니깐,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어떻게 하는지도 대충은 안다. 물론, 머리 속으로만.. 그러나 누구에게나 적정 수위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아직은 이 서경을 길들여야 할 때다.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진우는 서경을 잠시 바라본다. 정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분노보다는 더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언제나 오만하고 도도하기까지 한 이 건방 덩어리가, 치욕과 두려움에 뒤엉킨 표정을 보이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이 서경은 늘 자신만만한 인간이다. 비록 나이는 한 살 많지만, 어딘가 잘난 척을 하면서도 좀 어수룩한 면이 있는 귀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잘못 보면 살짝 밥 맛 인면도 있다. 어쩌다 남들 보기에 좀 잘난 척 하는 성격이지만, 진우에게는 재미있는 요기꺼리다. 딱 제 눈에 안경이다. 한 치의 틈도 없는 적당하고 평범한 사람..그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 가끔 서경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드러나는 은밀한 욕구를 제외하면, 항상 그 평가는 유지되었다. 진우는 이 사람을 이용할 목적이었다. 많은 면에서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용할 대상에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진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은 호락 호락하지 않다. 문제는.. 「.......저기.....................」 이렇게 말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압권이라는 사실이다. 안경을 벗겨내자 성질난다는 듯, 머리카락을 조금 흔든다. 그렇게 크게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지만, 침착하고 서늘해 보인다. 탄력적인 맨 살의 피부들도 떠오르고, 머뭇거리는 순간의 풀 죽은 모습은 거의 최강의 관음성을 부추긴다. 교복 셔츠를 확 잡아당기자, 양 쪽으로 깃이 벌어졌다. 점점 거실 한 구석으로 몰리는 바람에 서경은 베란다 문 앞에서 등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한 손으로는 당황한 듯 커튼을 꽉 쥐고, 진우가 벌려 놓은 맨 가슴을 의식하듯, 초조하게 입술을 축였다. 붉은 혀가 마른 입술 근처에서 빠르게 움직이다 사라진다. 이 사람이 우는 모습에 돈 천 만원이라도 걸고 싶은 게 딱 그 때쯤의 진우였다. 「.......그러니깐.......................」 처음부터 별로 심하게 놀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나 매사에 진지하니 더욱 사람의 가학성을 부추긴다. 그것도 밉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한 그 진지성이 좋다. 진우가 건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셔츠를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동안, 긴장한 피부가 조심스레 입술 아래 느껴진다. 정신적 공황 상태를 이겨내고 필사적으로 말을 꺼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다. 이 서경은 정말 근성 있다. 「....그러니깐... 너 지금 뭐하는............」 뭐하는 거냐니.. 원하는 게 뭐냐니.. 딱 하나 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괴롭혀 주겠다고 말했으니깐, 그 말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어디, 이 서경은 '괴롭히다'라는 말의 본의를 때리고 피 냄새나는 관계로 한정짓는 것 같은데, 조금은 손에 들어온 햇병아리처럼 파닥거리는 이 숨결이 측은해서 도저히 그럴 생각이 안 든다. 괴롭히는 것도 정도껏 상대가 만만할 때나 가능하다. 부드럽게 혀를 굴리며 쇄골에서 가슴 근처까지 내려가자, 아직 미지림처럼 풋풋한 유두가 입술에 꽉 들어온다. 한 손을 들어 천천히 매만지고, 나머지 한 쪽은 입에 품은 채 둥근 원을 그리는 것처럼 혀를 쓸었다. 잘근거리게 씹고 싶을 만큼 아직 순수해 보이는 꼭지를 입으로 짙게 빨아들인다. 훅..하는 짧고 거친 파음이 들리며,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복부가 한껏 긴장했다. 빠져 나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텐데도, 용케 손아귀에 잡혀 버려 가련하다, 이 서경... 진우는 흡족한 듯한 웃음을 식도로 삼키며, 마치 혀끝에서 잘 익은 알갱이처럼 매만져 지는 서경의 유두를 입술 전체로 감싸듯 덮었다. 공을 들이는 만큼, 성감으로 느끼게 된다면 어느 시점에는 짜릿한 반응이 온다. 사실 사람의 몸이란 길들이기 나름이니깐. 「....싫어...........」 뭔가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은 서경이었다. 천성이 요부니 하는 말을 믿는 진우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런 섬세한 변화가 몸을 후끈하게 만든다. 「.....--!!!!..........」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리며 청바지와 브리프를 한번에 벗겨 내자, 위쪽에서 고개를 돌리며 '끄응..'하듯 목마른 항의가 들려온다. 여전히 떨고 있는 손길로 진우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보이지만,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비디오의 신음이 들리는 순간 그 작은 요동도 멈춘다. 상대방은 전혀 벗지 않았는데, 혼자 벗겨져 있다는 것은 굉장한 수치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외설적인 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더군다나 진우가 정성들여 만지작거리고 애무한 탓인지, 봉긋하게 솟아난 가슴이 증거처럼 남겨져 있다. 흡사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발갛게 도드라진 그 흔적과 , 거세게 바지를 잡아당기는 진우의 행동으로 드러난 서경의 아랫도리는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다. 「...손으로 가리면, 비디오를 돌릴지도 몰라요........」 웃으며 말하는 진우의 목소리에 쭈삣거리던 손등이 뒤로 천천히 물러선다.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게 만드는 이 모욕적인 행위에 금방 감정이 격해지는 듯, 쇄골까지 붉은 기운이 흘러 내렸다. 아직 채 저녁이 되지 않은 탓에 어스름한 거실의 스탠드가 전부다. 진우는 약간 뒷걸음을 치며 마치 감상하듯 서경의 몸을 두루 두루 살폈다. 살짝 벌어진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며 철저히 진우의 시선을 외면하듯 버티고 있었다. 서경의 야릇한 떨림은 그의 유려한 가슴 선과 허리선을 타고 매혹적으로 잘 뻗은 허벅지 사이에서 잠깐 멈췄다가, 이내 종아리에서 발목까지 거침없이 이어졌다. 꼭 시간(視姦)을 당하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그를 범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뒤로 돌아서서.....」 「.....???..........」 아무리 태연한 척 하려해도, 이쯤 되면 진우의 신경도 바싹하게 고조되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해봐서 사내 놈이랑 뒹군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그 고집이 대단하고 흥미로워서 끌어들인 질 나쁜 장난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살며시 구미가 당긴다. 「.....뒤로 돌아서서 창문을 짚고 서요...........」 반면에 조금 탁하게 가라앉는 진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경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난주처럼 묶인 채로 생각지도 못한 곳을 관통당하리라 예상했는데, 이번의 요구는 보다 다르다. 자신에게 알몸인 상태로 뒤를 돌아 보이라는 명령이다. 「말을 못 알아 들었나 본데..」 그리고 그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지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과 동시에, 거센 손길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돌려세웠다. 짐승처럼 사육시키겠다고 한 건 장난이었다니깐 그러려니 하지만..자신처럼 이런 일에 문외한이라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서경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종류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있는 진우가 더 놀랍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벗겨진 정면을 관찰당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는 사실이다. 베란다 창문을 손바닥으로 짚은 채, 허리를 더 숙이게 만들고 발끝으로 서경의 발목을 죽 잡아 밀었다. 그 바람에 상체는 저절로 낮아지고 엉덩이 부분이 부각된 채, 다리가 벌려졌다. 「.......!.........」 이번에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제대로 튀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의 변태적인 새디즘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애널에 대한 애무는 결코 서경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인 것 같다. 진우는 서경이 부여잡고 버티는 커튼을 확 잡아당긴다. 아무리 어두워진 밖이라 하더라도 2층 밖에 안 되는 높이의 아파트여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쉽게 발각될 만한 위치였다. 일순간의 한기와 공포로 서경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녀석은 그 틈을 타고, 들어올려진 엉덩이의 양 쪽을 잡고 손으로 벌렸다. 지난주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하나 정도는 있다. 사내 녀석의 몸이라 하더라도, 꼭 여자의 벗은 육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전율이 일 정도의 쾌락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 전립선을 자극하면 발기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해 봤다. 억센 손길 때문에 깊은 속살이 녀석의 눈동자에 공개 된다. 찬 바람마저 속속들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서경은 녀석이 확 걷어 버린 커튼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이런 꼴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정말 자살하고 싶었다. 「......아-!.........」 그리고 이내, 짧지만 강렬한 신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아무런 예고도 없다. 그저 차가운 공기를 타고 물기 가득 담은 숨결이 그곳으로 다가올 뿐이다. 지난주에 녀석에게 농락당했을 때를 빼고는, 본시 자극을 받아 본 적 없는 서경이라 이런 종류의 일에는 울음이 날 정도로 민감하다. 그리고 단단히 놀란 마음도 덧붙여 한몫 한다. 「......으...ㅅ...........」 숨소리가 저절로 거칠게 밀려 나오자, 짚고 선 창문 유리벽으로 김이 서린다. 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오금이 저리고 허리 아래로 바짝 긴장이 몰려가며 뭔가 몸 안에서 튀어 나올 것처럼 욱신거린다. 할짝이는 소리의 음란성이 더욱 속도를 더 해 갔다. 이리 저리 허리를 비틀려 해도, 양쪽으로 꽉 잡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겨우 겨우 호흡을 참으려 애 쓸수록, 사람들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더해서, 자꾸 솟구쳐 오르는 내부의 긴박한 아찔함도 마구 뒤섞인다. 녀석이 뭘 하고 있고,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죄책감 같은 쾌감이 허를 찔렀다. 「......많이 아물었네..아팠겠어요, 선배.......」 그렇게 잘 보고 있으면서도 뭘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뒤 쪽에서 나른하게 울렸다. 괴롭히는 자의 오만함이 척추 끝을 간질인다. 이미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온 몸의 근육들이 딱딱하게 굳은 채 배출의 욕구를 가득 안은 서경을 향해 녀석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제발...........」 사람들이 볼 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 때문에 어떻게든 커튼을 가리려 다시 애썼다. 그러나 진우는 별 상관없어 보인다. 당연한 거다. 주도권을 쥐고 가는 쪽이 녀석이니깐. 녀석은 다만 매몰차게 천 조각을 멀리 걷으며, 천천히 물기 내미는 서경의 앞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휙- 빠른 바람소리를 내듯 심장이 거침없이 뛰어 오른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마구 날뛰기 시작하는 이 박동 소리는, 자신이 미쳐간다는 기분으로 전락시켰다. 그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촉촉하고도 약간 거친 녀석의 손바닥이 노골적으로 귀두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아찔함이었지만,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다만 기구와 약,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니깐, 실제로 뜨거운 체온 속에 허우적거리는 욕망을 대처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거다. 「......이젠...그만 ....좀.........해....이 새꺄...........」 긴 시간 사정의 욕구에서 허덕거리던 경험에 비해, 이번에는 너무나 강렬하다. 이미 온통 열기에 점령당한 곳을 손으로 직접 자극 당한다. 수축하고 이완하듯 만져가는 그 느낌은 정말 폭발할 것처럼 재촉을 가했다. 이렇게 뇌가 흔들리는 일은 처음 만났다. 「......아!....................」 급기야 몸이 펄쩍 뛰어 오를 듯 놀라며, 울음 같은 신음이 살짝 세었다. 녀석의 혀가 깊은 곳을 뚫고 내부까지 핥아갔기 때문이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의 감촉이 근육 하나하나를 풀어내듯, 치밀하고 야하게 움직였다. 이제 서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뇌수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동물적 욕구에 사로 잡혀 가늘게 할딱이는 것밖엔 없다. 곧이어 얼굴을 빼낸 녀석은, 서경의 것이 조금씩 묻어 있는 손가락으로 입구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훅.하고 숨을 들이켜졌다. 동시에 정말 무의식적으로 허리가 흔들렸다. 이물질이 삽입되는 이 불쾌감과 묘한 짜릿함은 한번 경험했던 바이다. 그러나 내벽을 긁듯이 안으로 들어오는 뜨겁고 단단한 손가락 때문에 저절로 몸이 수축했다. 「.....내 손가락 깨물지 마, 이 서경..........」 그 순간에 확 맞물리듯 강하게 들어온 녀석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마치 그곳을 몸의 또 하나의 입처럼 말하는 진우의 짓궂은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목덜미로 빠르게 번진다. 「...아아.....」 「....움직여 봐,.끝까지 가고 싶지?....... 선배는 뒤 쪽으로만 만족을 느끼게 길들여 질 거야.........」 어찌 할 바를 모르며 본능적으로 달싹이는 근육을 의식한 것처럼, 녀석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바람에 더 몸은 애가 타고 분노가 바락 치밀며,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치욕이 범벅되어 뒤엉켰다. 아아..제기랄 같이... 이번에는 녀석이 맞았다. 모든 감정이 격하게 소용돌이치며 의식을 이어가는 순간, 서경은 몸 쪽에 굴복하는 것을 택하고 말았다. 긴장되고 위협적인 순간에 고통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감정이 모두 섞여 버린 아수라 속에서, 기어이 몸의 정직함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도망이었다. l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것처럼, 진우가 다시 몸을 돌려 세워 서경의 멍한 손을 잡아당긴다. 언젠가의 말처럼 녀석은 정말 작정한 듯 삐뚤어지게 웃으며 서경에게 자신의 만족을 스스로 찾도록 유도했다. 그 악랄함에 기가 막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녀석은 음산할 만큼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 「.....이 자리에서 강간할지도 몰라요. ..........」 정말 정말 부드럽게 말한다. 그리고 눈물이 맺힌 서경의 멍한 얼굴을 보고도 여전히 웃고 있다. 서경은 잠깐의 깊은 심호흡 끝에 바들거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일어나는 살 내나는 욕구와 쾌락이 저주스러웠다. 「...아아...이왕이면 좀 더 편한 게 좋나?............」 거실의 소파에 앉혀 진 채로, 서경은 하얀 허벅지 안 쪽을 드러내며 다리 벌렸다. 아니, 벌려졌다. 무릎을 세우고 앉혀졌기 때문에 잔뜩 흥분한 몸을 의식해서 인지 제대로 닫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악마 같은 녀석의 발끝이 가차 없이 안 쪽을 파고들었다. 그 상태로 손을 앞으로 가져간 채, 서경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녀석 앞에서 운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럴수록 녀석이 더 괴롭히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것을 손에 쥐고 녀석의 흥미로운 시선 앞에서 자위한다는 굴욕적인 치욕감은 점점 더 서경을 궁지로 내몰았다. 겨우 겨우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열기를 흩어 나가지만, 부끄러움 가득한 눈물이 저절로 뚝 떨어져 손마디에 스민다. 온통 붉어진 채로 마치 도구처럼 손을 움직일 뿐이다. 「....하아... ..........」 눈물에 섞인 단 신음이 튀어 나온다. 그리고 동시에 녀석이 말했던 그 악마 같은 욕구도 같이 튀어 나온다. 몸 안의 빗장으로 단단히 묶여 있던 야누스 같은 또 다른 자신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 치욕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달궈 놓은 몸은, 끝내 스스로 제어할 요령도 없었고 방법도 모른다. 오히려 녀석이 다시 캠코더를 들이 밀고 녹화의 빨간 불을 켰을 때는, 주체가 안 될 만큼 음란함에 젖어 허덕거렸다. 「.....으응................」 달콤한 비음처럼 콧소리를 내며 서경은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이미 한번 망쳐진 것.. 이미 한번 궤도를 이탈한 것.. 이미 한번 금기에 손 댄 것.. 어차피 은밀함의 공범자가 이 녀석 뿐이라는 것..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얀 욕구가 달려온다. 이는 자신이 언젠가 주장했던 것처럼, '자위란 혼자만의 공간에서 하는 비밀스런 의식'이라는 의미에서 어렵게 변질된 감정이다. 그렇게 천천히 더 많이 추락하며 보다 자극적이고 적극적으로 쾌감을 찾아 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당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툭-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멍한 눈으로 겨우 앞을 봤을 때, 바닥을 뒹구는 녀석의 캠코더가 보였다. 동시에, 지금 자신을 타락시킨 악랄한 녀석의 등도 함께 보였다. 녀석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악독한 분위기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뭔가 일그러진 감정이라도 껴안은 사람처럼 당황한 듯 문득 뒤로 돌았다. 「.....으응................」 막 쾌감의 끝까지 치닫던 움직임이 급작스럽게 정지되고 대신 침묵만 흘렀다. 한참 숨을 삭히는 것처럼 등을 들썩이던 녀석이 빙글- 몸을 돌려 갑자기 다가온다. 「.....-!!!!!!!.....」 그리고는 그 어지러운 서경의 머리 속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만큼 팍팍한 한숨을 내쉬며 뜨겁게 입술을 포갰다. 소파에 앉은 자신 앞에 마치 온 몸을 끌어안듯 빨아들인다. 그 강한 흡인력에 압도당했다. 가볍게 흘리고 싶었던 작은 신음은, 혀를 씹을 것처럼 밀려오는 강한 입맞춤에 잡아 먹혔다. 가뜩이나 흥분한 세포들이 이 짙고 농밀한 입맞춤에 제압당한 것이다. 「....이런 ....씨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김진우의 욕설이 탄식처럼 튀어 나왔다.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음성이었다. 그 마른 듯 촉촉하게 내려앉는 한숨에 서경의 심장이 문득 거세게 뛰어 오른다. 숨결이 잦아드는 듯한 묘한 목소리는 생각보다 강하게 자신을 재촉해 된다. 물기 가득 섞인 아랫도리가 오싹할 만큼 달아올랐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그 때부터 더 격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교묘하게 자세를 바꾸자마자, 소파에 엎드린 자신의 등 뒤로 녀석의 강한 허벅지가 와 닿는다. 성급히 손으로 소파를 집기도 전에, 결코 맛 본적 없는 뜨거운 열기가 입구에서 느껴졌다. 서경은 욱- 하고 짧은 신음을 내던졌다. 숨이 찬 까닭에 저절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그와 함께, 이미 물기 질퍽한 입구가 거세게 꿰뚫린다. 「....아앗-!!!!!!!........」 땀으로 젖은 서경의 머리가 허공을 향해 잠시 흔들렸다. 머리가 멍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묵직하다. 그리고 또한 얼얼할 만큼 뜨겁게 몸 안을 이리 저리 움직인다. 아슬 아슬 하게 서경의 비명과 뒤섞여 녀석의 분신이 몸 안을 휘저었다. 「....으으응....으응.........」 결합된 지점의 음란한 움직임은 서경의 몸을 마음껏 뒤흔들어 놓았다.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뜨겁게 내부로 들어왔다 물러서고, 다시 점막을 마찰시키며 들어서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서경의 몸도 함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허리 좀 움직여 봐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내장을 끊는 듯한 엄청난 통증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밀려왔다 사라지는 퇴폐적인 쾌감도 그저 눈앞에서 간간히 불꽃을 튄다. 같은 수컷을 품고 동물적인 교미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이대로 더 엉망이 될 수 없을 만큼, 악마적인 본성이 내부를 할퀴어 간다. 「......아앗..아!...」 마침내, 고통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동시에 서경을 것을 꽉 쥐고 있던 녀석의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굉장한 쾌락이 통증을 억누르며 비명처럼 튀어 나왔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고 음란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녀석의 크고 단단한 손바닥 안에서 서경의 중심이 물기를 잔뜩 흘러낸다. 그와 동시에 몸 안을 유린하던 녀석의 뜨거운 열기가 내부에 젖은 스위치를 힘껏 건드렸다. 「......앗!.........」 대개의 경우 G-spot 이라고 부르는 선천적인 성감대였다. 서경도 이름 정도는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자신의 몸 속에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내부에 있는 것을 타인이 들어와 도발시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만큼 충격도 컸고, 자극도 엄청났다. 서경은 마치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교태어린 몸짓으로 움찔거려야만 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고, 외마디 교성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 만큼 외설적인 절정이었다. 그 순간에는 다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난잡한 욕구를 소원했다. 몸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바르르 떨려왔고, 본능적으로 그 환락을 조르기 위해 아래근육을 죄여갔다. 「......!.........」 그리고 눈물이 살짝 떨궈 지는 젖은 기분과 그에게 수치를 주는 자세에서 그대로 절정에 도달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 만큼의 허탈한 기분은 더욱 천천히 고문처럼 스며들었다. 5. 한참 후 둘 다 말없이 몸을 일으켰을 때, 거실에는 농밀한 살 냄새만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서경은 흠뻑 젖은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긴 달리기를 끝낸 것처럼 한없이 숨결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꽉 깨무는 바람에 도톰하게 부푼 아랫입술도 그대로 담겨 있다. 조금은 멍멍한 시선이었고, 어딘가 불분명한 동공으로 앞을 쳐다 볼 뿐이다. 말없이 청바지의 버클을 채우며, 진우는 피곤한 모양으로 뒷목을 몇 번 툭툭 두들긴다. 그리고는 여전히 입을 꽉 다문 채로 커튼 근처에 널브러진 서경의 옷을 집어 이 쪽으로 휙 던졌다. 어딘가 굉장히 불만 가득한 몸짓이었다. 딱히 이유를 물을 배짱도, 혹은 그 이상도 안 되는 서경이었지만 마음속이 일순 서늘하게 얼어붙을 만큼, 냉정하고 딱딱한 태도였다. 「....나는........」 그리고 주섬 주섬 떨리는 손끝으로 셔츠의 단추를 다 채웠을 때, 녀석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서경은 그 때까지 좀 더 멍하고 허무한 심정이었다. 죄책감이 가득 느껴질 만큼 그 강렬한 쾌락에 비해서, 너무나 허망한 감정이 스믈 스믈 갈비뼈로 밀려온다. 어딘가 배가 고픈 것처럼 굶은 기분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더 없이 목이 마르기도 했다. 설명이 안 될 정도로 텅 비어버린 기분이이서 너무나 너무나 허탈했다. 막상 진우가 취하는 태도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경은 주의를 현실로 되돌리기 위해 재빨리 떨어져 나간 단추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선배랑은 두번 다시 안 해요...」 단추는 없었다. 또한 서경은 방금 무엇을 한건지 녀석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다만 몸 안에 남아 있는 미지근한 물기와 열기가 한번에 빠져 나가는 기분만 감싸 안았다. 지나칠 정도로 체온이 급격히 하강하며, 상처 입은 환부와 마음이 동시에 욱신거린다. 1. 그 일이 있고 딱 삼주가 흘렀다. '두 번 다시 선배랑은 안 해요' .. 라는 이상한 선언 이후로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두 번 다시 자신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서경의 입장에서 보면, 동성이랑 몸을 섞었다는 묘한 뉘앙스의 그 사건에 대해 되짚어 볼 여력도 더 이상 없다.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치욕인 시간들이었고, 또 달리 보면 그 치욕과 무분별한 쾌감에 속수무책 빠져드는 일상이었다. 이젠 일상적으로 쌓여가는 비디오 목록을 보며, 서경은 마침내 자신이 주연으로 나오는 비디오가 모두 저질 성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얼이 빠질 지경이다. 이제 말도 안 되는 내기의 빌미가 그저 녀석의 상스러운 장난질을 위한 덫이었다는 걸 인정할 때가 온 거다. 그것만이 서경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 판단이었다. 「....문제가 뭐야? 내가 구원해 줄께..」 학교에서의 어느 점심시간, 또 다시 멍해진 서경의 등을 치며 수완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책상에 앉은 채, 조금 망연히 올려다보니 수완과 기연이 함께 내려다보고 있다. 기연은 작년까지 활동하고 동아리를 나갔다. 녀석은 영화도 좋지만, 자신은 다른 것을 전공하고 싶다고 분명히 밝혔다. 어찌 보면 기간을 정해 놓고 몰두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해 입장이 확실한 녀석이다. 날이 선 조각처럼 반듯한 기연의 얼굴을 보며 서경이 한숨쉬었다. 만약 기연이 녀석처럼, 자신도 그런 선택을 했으면 애당초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너, 우리 모르게 누구랑 사귀냐?..」 학교 건물 앞 스탠드에 앉자마자, 수완이 음료수를 내민다. 늦봄의 열기를 만끽하는 냥, 기연이 긴 다리를 쭉 폈다. 「....아니.....」 「....그럼, 문제가 뭐냐...이 서경?..」 「...................」 너 요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고 타박하는 말투로 수완이 씩 웃었다. 「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마침 기연이 넉살좋게 웃으며 허공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시원시원하고 물 좋아 보이는 녀석이 바싹 서경의 옆으로 다가 앉으며 마치 놀리는 것처럼 귀에 입을 붙인다. 「너 연애질하지?」 「................--!!!...」 서경이 화들짝 놀란 것은 기연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그 친밀감 섞인 친구 녀석의 행동에 이상한 방향으로 확 튀어 오른 심장 소리 때문이었다. 이렇게 은밀하게 속삭이는 행동이 간지러움 외에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 천하의 악마 김진우 때문이다. 기연과는 원래 친했다. 이런 식으로 장난도 많이치고.. 수완과 기연, 그리고 서경은 늘 붙어다니는 사이었다. 「이 서경. 형님 눈 보고 똑바로 말해. 너 최근에 천하의 미스테리 맨 김진우랑 붙어 다닌다더라?」 「그래.. 주말에도 거의 녀석이랑 같이 보낸다며? 혹시 우리 모르게 여자 소개 받고 시치미 떼고 있는 거지, 너?」 문득 가깝게 붙어 오는 친구들의 등쌀과 체온 때문에, 조금 허리를 뒤로 빼며 서경이 찡그렸다. 여기 저기 가벼운 속사포 식으로 쏟아지는 호기심도 짜증나고, 접촉도 짜증난다. 예민해 졌다면 그건 비단 몸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경도 곤두서 있고, 항상 뭔가 쫓기는 기분이었다.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 조 수완.」 「뭐가 말이 안 돼? 우리도 다 듣는 게 있고 보는 게 있다구..」 수완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경을 향해 v 자를 그렸다. 이건 절대 v 자를 그릴 만큼 도덕적인 일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혐오가 느껴지는 일이다. 오히려 이 쯤되고 나니 서경은 진우에 대한 감정보다는 자기혐오가 더 앞섰다. 어쨌든 녀석의 의도대로 느끼는 것이 증오스러운 일이다.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몇 주 지난 오늘에는 친구 녀석의 숨결에도 갑자기 놀란 가슴으로 신경이 바싹 타오른다. 「얼굴 좀 치워, 새꺄..」 마침내 서경은 짜증을 버럭 내며, 말끔하게 생긴 기연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 단순한 반응을 그저 재미삼아 놀리듯 기연이 더욱 얼굴을 붙이며 웃었다. 녀석에게는 이미 장난으로 변해 버렸다. 혹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서경의 속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행동하는지 모른다. 「왜? 왜? 우리 순진한 이 서경 군이 요새 여자랑 놀아나더니 민감해 졌어?」 녀석과 수완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서경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손사래를 치기도 전에, 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웃는다. 가뜩이나 정신 사나워 죽겠다. 「빨리 까 발려, 이 서경~ 형님들이 좋은 말로 할 때..」 그러나 힘이 넘치고, 장난이 난무하는 피 끓는 혈기의 기연이 가만 놔 둘 리 없다. 계단을 딛고 일어서려는 서경의 어깨를 꽉 집으며, 위청거리는 몸을 마구 잡아 당겼다. 이 녀석들은 그저 재미있게 놀려는 수작이었지만, 서경의 정신은 계속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다. 「기연이 선배....」 그리고 서경의 무릎을 깔고 앉은 기연이 막 해 맑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엉겁결에 들리는 목소리였다. 늘 치던 장난처럼 여느 녀석들의 살가운 행동에 지나지 않는데.... 문득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자신도 웃겼고, 친구들이 여자 문제로 오해하는 모습도 피식 웃음 나오고 해서...... 서경도 때마침 마지못해 헤헤 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야...김진우.. 너 오랜만이다.」 벌떡.. 서경이 황급하게 허리를 바동거림과 동시에 기연이 일어섰다. 만면에 반가운 기색이 완연한 기연이었고, 그에 알맞게 웃고 있는 진우였지만, 서경의 등골로 싸늘한 바람이 흘러간다. 운동장이 훤히 보이는 이 스탠드 계단에서, 이 녀석을 향해 솟아오른 더듬이는 긴밀한 초조함으로 날을 세운다. 혹시나 녀석이 섣부른 말을 한마디라도 던질까봐 노심초사할 따름이었다. 「안 그래도, 임마.. 네가 이 왕 순진한 이 서경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준 게 아닌가..해서.. 이 형님이 좀 걱정하고 있었다, 진우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모르니깐 그렇게 행동하겠지만, 기연이 서경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으며 너스레를 떤다. 이전에도 이런 상황은 몇 번이나 있었다. 다만 그 때는 진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해, 지금처럼 휙 고개 돌리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서경은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아직도 나날이..스스로의 도덕성과 정신에 타격을 입고 있는 중이다. 「S is...에 대한 이야기 만 하고 사는 건 아니지, 너희들? 이제 좀 털어놔 봐라, 김진우. 너랑 이 녀석이랑 도대체 뭘 하길래. 내가 불알친구인 아리따운 이 서경을 주말마다 빼앗겨야 하는지.. 」 수완이 한 술 더 뜬다. 문득 서경은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는 기분이 든다. 「주말마다..뺏겨요?...」 마치 금시초문인 듯한 저 표정. 서경은 진우의 착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보며, 숨이 탁 막혔다. 여차 하면 대학에 진학해서 연극무대에 서 보고 싶은 서경이었지만, 김진우야말로 연기자에 가까운 녀석이 아닌가. 「아....」 그리고 눈알을 굴리는 두 작자들을 향해 진우가 씩 웃었다. 언제나처럼, 사람 서러울 정도로 따뜻한 미소다. 「서경이 선배와 주로 강아지 이야기를 나눠요. 요새 애완동물에 부쩍 관심이 많아져서요..」 「강아..지?」 서경도 개를 키운 일이 없지만, 진우 녀석이 개를 키우는 것도 보지 못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수완과 기연, 그리고 가운데서 어쩔 줄을 모르며 서경이 슬금 슬금 뒷걸음을 친다. 그 모양을 보며 녀석이 빙긋이 웃었다. 시선이 떠나갈 줄 모르는 표적처럼, 정확히 서경을 향해 꽂혀 있었다. 「...!...」 저건 내 이야기다... 그 적나라한 시선과 미소를 불현듯 응시하자, 오싹한 감각이 피부를 쓸어갔다. 본능적으로 서경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네, 강아지... 제가 기르는 녀석이 요새 부쩍 물이 올라서 발정기 인거 같은데.. 아무나 저 친한 놈이 있으면 가서 비비거든요.」 「거 참..정말 멋진..대화군..」 수완이 기 막히다는 표정으로 서경과 진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서경이 말문 꽉 막힌 듯, 입술만 살짝 여무는 까닭은 간단했다. 웃고 있지만, 날카로운 눈빛이 머리카락을 쭈삣 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런 진우 녀석의 시선을 이젠 알고 있다. 마치 사람을 헤집는 듯한 시선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각오해야 하는 시선이다. 서경은 요새 부쩍 깨닫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인간적인 미소와 든든함을 갖춘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결론이라는 것을... 아마 서경 자신도 녀석과 얽히기 전까지는, 잠깐씩 스쳐가는 저 짧은 눈동자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안다. 이렇게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학생들이 춘추복마저 저마다 버거워하는 높은 열기 속에서, 서경은 이따금씩 스쳐가는 진우의 짧은 변화를 읽어낸다. 어찌보면 안테나처럼 바짝 서 있는 온 몸의 긴장감과 경계심 때문이다. 「그렇죠, 서경이 선배?....」 나른하고 조용한 음성. 절대 다른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 그러나 어떤 감정도 품지 않은 냉정함이 바닥으로 흐르는 그런 진동.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진우의 동공은 살벌한 기색을 살짝 품다 재빨리 감추었고, 대신 서경은 잠시 바르르 떠는 것처럼 남몰래 뒷걸음치듯 뒤로 물러선다. 차가운 손바닥을 올려 이마에 집는 내도록, 녀석의 그 차가운 눈동자는 싸늘하게 서경의 얼굴에서 머물렀다. .... 그 시선은 바로 서경의 도덕성을 매일같이 시험하는 짧은 경고의 일환이었다. 서경은 경고의 의미를 모를 뿐, 얼음같이 말하고 있는 주의사항을 느끼고 있다. 2. 유기연이 마침내 나타났다. 진우는 속으로 이를 갈 듯 격하게 자신의 집 현관문을 잡아 당긴다. 여느 때와 같을 뿐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김진우에게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달칵.. 그는 집에 들어오자 재빨리 책상을 향해 다가섰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으로, 그의 어딘가 억눌린 듯한 행동이 거친 소리를 낸다. 힘을 주어 손잡이를 당기자 책상 서랍이 무겁게 열렸다. 아마 그 동안 쌓여 있던 짐이 많은 모양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마음의 평정을 조금 되찾았다. 서랍 깊숙한 안 쪽에서 지난 몇 년간 꺼낸 적 없는 사진 하나를 꺼내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곳에는 진우조차 본 지 오래된 사람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길고 유연한 손가락을 쭉 펴서, 사진의 얼굴 부분을 쓰다듬듯, 묘하게 문질러 본다. 사진 속의 중년 남자를 쳐다보는 진우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곧 그 표정조차도 바람처럼 잦아 들었다. 그는 원래대로의 무심하고도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온 채, 사진을 다시 원래의 위치에 밀어 넣는다. 어쨌든 원하는대로 되어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서경을 끌어들이면 유 기연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유.기.연. 오늘 이 서경을 향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짓던 남자, 유기연. 유기연은 김진우의 마음을 여러가지 이유로 복잡하게 만들어온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것은 기연 그 자신도, 혹은 그 이외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지난 2년 가까이 거의 사실이었다. 기연에 대한 진우의 관심은, 그가 S is...를 적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자신이 알기에 유기연은 분명히 S is...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는..그 깨끗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인상의 아름다운 고등학생 유기연은 분명히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진우의 가정은 그가 열 네살이 되던 해에 완전히 갈라졌다. 이른바 원조교제. 그것도 불순하기 짝이 없게 어린 동성의 남학생과 학교 교사 사이에서 벌어진 원조교제. 그러나 원조교제를 했다는 명목으로 진우의 아버지는 처벌당해야 했지만, 상대 남학생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 할지라도, 진우에게 그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결론이었다. 그 후로, 그는 그 비슷한 경우만 봐도 몸서리가 쳐 진다. 마찬가지 일을 저질러 온 유기연의 경우도 그렇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마치 모든 권리를 다 쥐고 태어난 것처럼 교묘하게 웃으며 자신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아.....」 두통이 쿵쿵 관자놀이를 스침과 동시에 진우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뭐든 가지고 태어난 완벽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김진우라는 인간은 나이보다 훨씬 주도면밀하고 냉정한 편이며, 더군다나 적의에 가득차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진우는 유기연의 원조교제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있는 것원조교제 때문에 사회로부터 쫓겨난 그의 아버지도 문제였지만, 그에게는 유기연도 마찬가지 의미였다. 만약 유기연이 다른 모자란 점이라도 있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억누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연은 분명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깔끔한 외모의 선배였고, 그가 그런 행위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그저 자기 만족적인 행위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진우가 보기에 기연은 그저 재미와 이득을 위해, 교묘히 범죄의 손을 빠져 나온 위선자일 뿐이다. 기연은 어떤 의미에선 진우가 세상에 대해 가진 복수와 같은 감정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이 서경이 필요했다. 자신이 느끼기엔 분명 기연이 서경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유기연을 이 일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서경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진우가 서경에게 관심을 보이고, 계속 자극해 대는 이유이다. 그리고 오늘도 깨달았다. 유기연은 이서경의 일에는 결국 나서게 되어 있다. 1. 기연은 이 날 이 때까지 아무 문제 없이 살아왔다. 동기인 이 서경과 김 수완과 함께 지난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해 왔고, 16mm 영화 주연도 곧잘 맡으면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어딘가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은 주변 여고에서 많은 여학생 팬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에게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한 두가지의 비밀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영화를 그만 둔 것은 올 해 초부터였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영화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일년 정도 중지한 것이다. 고 3을 지내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그는 수완이나 서경처럼 연극영화과에 지망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비해 굉장한 야망이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낮쯤에 오랜만에 동기인 수완이 찾아왔다. 동아리를 떠난 기연이었지만, 서경이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수완의 걱정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유기연에게 이서경은 아킬레스 건이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지 못하는 그의 정체성은 바로 그가 이 서경에게 호감을 가져왔다는 것과 관련 있었다. 기연은 중학교 일학년 이후로 한번도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다. 과연 그 전에도 여자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학교 친구녀석들에게 만큼은 깨끗하고 좋은 느낌으로 남고 싶었다. 마지막에 동아리 활동을 중단한 것은 그 이유가 컸다. 서경과 고 3을 같이 보내야 한다는 아슬 아슬하고 위험한 상황을 잘 견딜 자신도 없었다. 그냥 진우 녀석과 영화를 고민한다기에 그런 줄 알았다. 안색이 창백해진 서경이 자신을 향해 비로소 웃기 전까지는 그러리라 생각했다. 「안녕..기연이 선배....」 기연은 막 테니스를 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학교 건물의 뒷쪽에 위치한 넓은 테니스 장은 기연이 늘 붙어 사는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바로 테니스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완벽한 백 핸드 발리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모처럼 어려운 것을 끝냈다는 기쁨도 잠시.. 기연은 테니스 코트 바깥 쪽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낯익은 얼굴에 흠칫 놀래고 말았다. 「진우였냐..뭐야..하하놀래라.....」 정말 놀랬다. 그것은 아주 짧게 진우를 스쳐간 묘한 불량스러움 때문이었다. 지난 1년이 넘게 예사로 보아온 이 후배 녀석 때문에 대뜸 놀란 것은 그저 어떤 본능 때문이다. 「무슨 일 있냐?..니가 느닷없이 무슨 일로....」 영화에 관해서라면 수완이나 서경과 의논해도 좋을 일이다. 그러나 그 섬칫한 눈빛에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벤치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의자에 노곤한 몸을 앉히는 순간까지 이유없이 몸이 자꾸 긴장되어 온다. 「후배가 선배를 찾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그래..어찌보면 녀석의 말이 맞았다. 자신과 진우가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소원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녀석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진우는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나 누구보다 맡은 일을 열심히 했으며, 또 가장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따금 이유없이 녀석이 마음에 비웃는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거나 서경을 노려보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냥 또래들이 가지는 선배에 대한 불만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주 가끔 삐딱한 표정을 짓고 그런 말을 툭 던지는 것 외에, 눈에 띄는 나쁜 점은 없었다. 단, 웃을 때만은 더 없이 부드러워 보인다. 벌컥 기연은 귀티나게 생긴 얼굴을 치켜 들며 음료수를 병 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물기가 뚝뚝흐르는 건강한 피부의 움직임을 마치 노려보는 듯한 진우다. 그러나 기연은 어쩐지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서경이 선배 좋아하시죠?....」 「.....-!!!!」 그리고 툭.. 마치 사래가 들린 것처럼, 포카리스웨트가 목에서 따끔거리며 튀어 나온다. 험한 기침이 시작되는 기연을 그러나 싸늘하게 쳐다보며, 진우가 웃는 듯 부드럽게 속삭인다. 「어떤 중요한 것이 망쳐질 때의 기분을 아세요?」 「-!!!!!!!!!!!!」 부드럽게 웃는다. 마치 기연의 맞은 편에 서 있는 키 큰 후배 녀석은 세상을 등진 악마처럼 정말 부드럽게 웃는다. 그 강한 인상에 제압당한 채로 기연의 손이 갑자기 부들 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서경이 선배랑 영화 찍으실래요?」 「너.....」 「..선배님이 주연이어야 합니다.」 「너...미쳤냐..?.....」 그리고 마침내 마른 입술이 힘겹게 달싹이며 기연은 겨우 그 햇살에 눈쌀을 찌푸렸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진우의 표정은 똑똑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너무 감미로울 정도로 웃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녀석은 여태까지 항상 그렇게 웃어왔다. 「안 찍는다면 선배도 뭔가 대신 희생해야 해요.」 마침내 기연에게서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다. 이것은 이미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어설프게 선배에게 장난을 치거나, 혹은 그냥 흘리는 말이 아니다. 이미 결론 난 싸움에서 승자가 지닐 수 있는 악마 같은 쾌감의 미소다. 싸늘한 오한이 척추 마디를 짓눌렀다. 「이 서경이라는 이름 하나에 간단하게 넘어 오시네요. 너무 그렇게 간단하면.. .재미가 없잖아요?뀉뀉..」 「너, 미쳤냐구?!!..」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서경이 선배는 정말 기연이 선배의 약점이라는 것..」 그것도 부쩍 마음에 안들지만요이라고 덧붙이며 얼음같이 녀석이 웃었다. 기연이 고개를 돌린 채로, 숨이 막힌 것처럼 겨우 호흡에 길들여질 무렵에,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사라졌다. 대답 같은 것은 애당초 필요 없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기연이 알아듣기를 원했을 뿐이다. 2. 문득, 서경은 희미해진 정신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온 공간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자신이 토해내는 한숨 외에 모든 것이 정지된 기분이다. 오늘의 김진우는 어쩐지 더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머리를 새로 염색한 것 같았는데 그 밝아진 금발의 끼가 그를 더 저질로 느끼게 만들었다. 왠지 나날이 더 악독해지는 기분이다. 서경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녀석은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이상한 말을 물은 것이다. '유기연이면 괜찮아요?'라고 그 이상한 질문이 왜 튀어 나왔는지 영문을 알기도 전에 그는 진우에게 동아리실로 끌려 들어왔다. 수업 중간에 불려 나온 것도 신경 쓰였지만, 그 이후로는 상황을 분별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한가지 만은 분명하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녀석의 마음이 심하게 격렬해졌다. 미소가 더 부드러워 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감미롭게 웃을수록, 더 크게 녀석이 동요한다는 증거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도 분명하다. 녀석이 화가 난 이유에 유기연이 관련되어 있고, 자신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것 외에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벌 받는 기분이 든다는 것.. 「...으응........」 숨을 들이쉴수록 아래가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제대로 호흡해서 근육들을 이완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허리를 조금 비틀자, 애널이 본능적으로 입구에 맞물린 것을 꽉 죄여갔다. 점막을 할퀴듯 들어와 입구를 잔뜩 벌려 놓고 발갛게 물들이는 그것은 그냥 마이크 철대였다. 가끔 야외 촬영을 나갈 때, 음향 담당이 들고 뛰는 그 마이크. 대개는 부드러운 스폰지를 입혀서 나가지만, 오늘은 벗겨진 채,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서경을 도발하고 절정으로 몰아가기 위해 삽입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거 넣어 볼 수 있어요?' .. 라고 마치 장난처럼 말하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처음부터 밀어넣었다. 그것도 일부러 창가 쪽을 고른 듯한 환경이다. 두개를 붙인 책상에 올라가, 개처럼 엎드리게 하고는 마치 애널을 달래듯 허벅지 사이에 입맞춤을 퍼부어 흥분시킨 것이다. 그 상태로 눈물이 눈꼬리에 맺힌 서경의 몸을 철로 만든 봉이 그대로 꿰뚫었다. 사람의 체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낱의 도구. 그것은 너무 차갑고, 또 한편으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뒤에서 웃는 듯한 녀석의 예상대로, 이미 달아오른 서경의 허리는 들썩이고 말았다. 움찔..하며 짜릿함이 허리 아래에 느껴졌고, 곧 이어 날카로운 경고음이 겨우 이성으로 머리 속을 막 울린다. 아직 학교 안인데..라는 약간의 제 정신적인 생각이었다. 「...아읏.........」 「소리내면 누가 올지도 몰라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진우의 그 한마디에 서경은 찢어질 듯 입술을 깨물었다. 꽉 닫은 눈꺼풀에서도 속눈썹이 떨린다. 머리 속으로는 동아리 실 내의 모든 풍경이 흘러간다. 수많은 테이프들과 영화 관련 서적들, 그리고 전일제나 그 밖의 발표회를 위해 찍었던 동아리 포스터들과 홍보물들. 그것이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풍경들그러나 그와는 전혀 반대되고 추잡하게 자신이 흘리는 신음들.. 「..아흣..-!!!!.」 그리고 그 순간, 서경은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흘리듯 흐느꼈다. 비어 있는 동아리 실에서, 공개된 공간에서 유린당하는 기분을 생생히 깨달은 것이다. 교복은 마치 몸의 부끄러운 부분을 부각시키는 듯한 천 조각에 불과했다. 처음에도 이랬다. 셔츠만 겨우 남은 채로 녀석에게 도발당했다. 그것도 녀석이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상황에서 몇 번이나 야릇한 울음을 스스로 흘리며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 때는 적어도 막혀 있고, 비밀스러운 녀석의 집이었다. 지금처럼 문만 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학교가 아니었다. 비록 아무리 수업 중이라고 해도 누구나 중간에 빠져 나와 이 곳에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서경은 두 개 붙인 책상에 올라간 채로 동물처럼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있다. 하얀 교복 셔츠 만이 위태롭게 상체를 감출 수 있었지만, 다른 부분은 여지 없이 관찰자에게 공개된 것이다. 벗겨진 듯 만 듯한 교복 셔츠가 더 야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태에서도 느끼고 말다니..자신이 무척이나 비도덕적인 음란한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공개된 장소에서 체벌처럼 가해지는 극한 자극은, 서경의 남은 판단력을 하나 하나 파괴해 간다. 「...아!!!!...」 그리고 순간, 몸이 튈 듯이 소리가 세어 나왔다. 잔뜩 흥분한 몸에서 사정감이 가득한 때를 노려, 녀석은 일부러 마이크 대를 뽑아버린 것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강렬함이 척추를 싸하게 흘러 내린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모두가 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에게나 공개될 수 있는 그런 장소에서.. .. 더할 나위없이 굴욕적인 자세로 그러나 진우의 모양 좋은 손가락이 뜨겁게 앞쪽을 감싸 쥐자, 마치 조르는 것처럼 끝내 서경의 입에서 탄식이 흐른다. 그것은 그냥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래..그저의 반응일 뿐이다. 마치, 배고플 때 입안으로 침이 고이는 것처럼 머리 속이 게워지는 것 같은 음란한 욕구 때문에 이는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사정을 하고 싶은 욕망과 지금까지 길들여 진 것처럼 내부를 범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서경을 아프게 두들겼다. 눈에서는 이 믿지 못할 감정 때문에 서러워질 정도로 갑자기 눈물이 막 고이는데, 몸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힘겹게 할딱이고 만다. 「선배가 직접 벌려 봐요. 나도 얼마나 벌려질 지 궁금해.」 거부하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자, 이마 위에서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렀다. 앞 머리 쪽부터 해서 완전히 젖어 버렸다. 「그럼 더 해드려요? 조금 있으면 수업이 끝난다구요..」 짧고 나른한 말로, 마치 날씨에 대해 묻듯 녀석이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더 많은 자극으로 서경을 장악하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 유두를 튕긴다. 나날이 성감있게 발전하는 것을 반영하듯, 뾰족하게 부풀어 오른 분홍빛 유두가 잠시 흔들렸다. 머리 속으로 칭- 하는 짧은 쾌감이 세포를 뒤흔든다. 온 통 도구처럼 사용되는 자신의 몸과 성감이었다. 이미 서경은 혼란에 휩싸인지 오래다. 그에게는 지금 한 가지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못 견디게 쾌락을 탐닉하고 싶은 충동...이것보다 더 엉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마구 흐트러지는 숨결.. 또 다시 서경은 자신을 체념한다. 녀석은 두번 다시 자신을 직접 안지 않지만, 이미 그 날의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뇌가 잠기는 것 같은 이 쾌감의 절정이 얼마나 황홀한지.. 그리고 조금만 포기하면 녀석이 상처럼 그 절정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이다. 마침내 스스로에 대한 증오감을 가득 담은 채로, 천천히 서경은 오른 손을 뒤로 가져가 스스로 입구를 벌리기 시작한다. 조르는 것 같은 이 행위에, 온 몸이 떨리는 수치심과 새로운 자극을 동시에 끌어 안았다. 「..잘 하네요, 이제..」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그 태도에 눈물이 뚝뚝 흘러 책상 위에 번진다. 땀과 뒤섞여 버린 눈물이다. 화학작용 같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것에 화가 났다.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녀석에게도 화가 났다. 「언젠가는 선배가 직접 이 곳을 볼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아니.......모두에게 공개할까요?」 그러나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저 잔인한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진우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냥 저 차가운 이물질이 몸을 통과해서 얻게 되는 불분명하고 기계 같은 쾌감 이상의 것을 이미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가장 충격적이고 경악스런 감정이었다. 스스로에게 기가 막히고 미칠 것 같은 분열감이다. 이미 자신은 미친 것이 분명한듯.. 물건이나 도구가 아니라 타들어갈만큼 뜨겁게 맥박을 올려 놓던 그 때의 사람 체온을 원한다. 「..아ㅅ!..」 마치 서경의 마음을 이미 읽어 내는 것처럼, 그 순간 진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서경의 앞을 꽉 쥐었다. 그러나 짧은 비명이 세어나가자, 나른하게 몸을 숙인 녀석은 벗은 어깨 위로 혀를 굴리며 속삭인다. 「사람을 원하죠?도구가 아니라..사람이 전율이 날만큼 내부를 찔러주길 원하죠? 절대로 안 돼. 선배가 원하는 건 하나도 해 줄 생각이 없어.」 「..!!!!...아흑........」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큰 소리 쳤잖아요? 깨끗한 얼굴을 가지고.이쁘장한 얼굴로 뭐든 잘 하는 척하는 선배는 .. 그러니깐 이런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예요.」 「....힛-!!!!....」 그리고 앞과 뒤를 만지는 손길 그대로, 이미 젖은 마이크 심이 몸 안을 다시 꿰뚫어왔다. 전혀 봐 주는 것 없이, 놀랄만큼 격렬하고 묵직하게 침범하는 움직임이다. 내부가 다시 움찔거리며 휘저어지는 기분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허리와 엉덩이가 야하게 리듬을 타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차가운 금속이 움직여지는 방향으로 속수무책 교성이 비명처럼 흐느껴진다. 그리고 더 많이 눈물이 흘렀다. 쾌감이 클수록, 분하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이 머리가 흔들리는 쾌락을 끊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김진우의 뼈를 부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그 녀석에게 천천히 정복 당해간다. 결코 빠르지 않게, 결코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에 맞춰 자꾸만 자꾸만 치부를 드러내고, 잔뜩 농락당하고 그렇게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길들여진다. 녀석이 정말 자신의 말대로 서경을 범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날마다 그와 견주어 지는 일을 당한다는 것은 이제 일상처럼 굳어갔다. 그게 가장 무섭다. 녀석의 말처럼, 의도처럼.. 가장 두려운 순간에 그저 솔직한 몸의 쾌락으로 숨어 버리는 자신의 나약함이 무섭고, 끝을 알 수 없는 녀석의 의도도 무섭고.. 이제는 차라리 범해졌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이 가장 무섭다. 몸은 어차피 서서히 자극에 익숙해진 이상 그냥 둘이 같이 해 버리는 거면 낫겠다 싶었다. 그런 거면 차라리 괴롭히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몸서리 쳐진다. 한달 반 전의 서경이었으면 절대 꿈도 꾸지 않았을 생각이다. Sadist. 왜 하필 나야 왜 다른 인간이 아니고..나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 왜 네 놀이감이 나야 4.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경은 욱씬거리기 시작하는 몸의 근육들과 평소보다 높은 열을 의식하며, 마치 잡아 먹을 듯 성적표를 노려본다. 개학하고 처음으로 나온 모의고사 결과다. 겨울에 있는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먹더라도 이 정도 점수로는 대학은 물 건너 간 거다. 「..괜찮아? ...」 수완이 등 뒤에서 서경의 어깨를 툭툭 친다. 녀석도 자신의 성적을 얼추 보았음이 분명하다. 다른 녀석들이 쉬는 시간을 맞이해서 한 때로 몰려다니며 떠들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책을 보는 몇몇의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 아아라고 짧게 한숨쉬며 서경은 책상에 엎드린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영화를 찍었다. 누구보다 가장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었다. 영상 컨테스트에서 입상도 해 보고 싶었고, 사실 지금 서경의 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야 진학이 가능하다. 그런데 김진우라는 녀석이 대뜸 인생에 끼여들었다. 너무나 추락한 성적도 걱정되지만, 이제 서경은 일상이라는 게 뭔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학교에 등교해서 수업을 받는 것도 그저 하나의 영화 속 장면처럼 무심히 흘러간다. 마치, 자신은 객석에서 구경하고 있고, 세상은 자신이 빠져 나온 빈 자리에도 상관없이 그저 계속 바쁘게 지나치는 기분이다. 서경은 자신의 눈동자가 비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흔들리고,..흔들리고..계속 흔들린 채 정처없이 추락만 거듭하고 있다. 처음의 그 야무지고 당차던 성격 같은 건 어디로 가 버렸을까.. 「이제 그만 결정 내려라. 너, 너무 이상해..졌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개새꺄」 고개를 팔에 푹 파묻은 채, 서경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친한 친구인데.. ..하나도 털어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이 아는 한, 이런 일을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기껏해야 김진우 하나 뿐이다. 녀석이 벌려 놓은 일이니..녀석 밖에 답을 모른다. 그러니 더 미칠 지경이다.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가도 그 출구가 김진우 밖엔 없다. 극단으로 치닫는 하루 하루의 감정 속에, 그것은 사디스트의 덫이다. 5. 집으로 향하는 동네 놀이터에는 밤이라 그런지 사람도 없다. 보통 때라면 동네 사람들이나 다른 녀석들이 어슬렁거리는 집합소인데, 오늘은 그마저 하나 뵈질 않는다. 문득 저녁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에 부딪친다. 교복 자락이 그 공기에 휘말려 버렸다. 서경은 놀이터 그네에 앉은 채, 이를 갈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문득 동네 놀이터 미끄럼틀에 기댄 녀석의 키가 더 커 보였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비스듬하게 손을 꽂고 있었고, 전에는 몰랐는데 한쪽 귀에는 은제 링 귀걸이가 달려 있다. 그리고 묘하게 그 이미지가 퍽이나 어울린다. 이제는 아주 막 나가기로 했나보군.. 그 동안의 이미지는 사실 거짓말이었다, 이거지 서경은 그네의 쇠사슬을 꽉 쥐며 고개를 휙 돌린다. 「영화를 찍든 개나발을 불든, 니 마음대로 해, 김진우.. ....이젠 니 마음대로 해.」 「항복한 거예요?」 새삼 악마처럼 미끈하게 생긴 녀석의 면상을 다시 뚫어지게 노려보며, 서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잘못 생각했다. 역시 이렇게 한번에 일어서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몸에 무리가 간다. 「이러지 마, 이 개새꺄.. 난 」 「............」 「난..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정상.? 선배에게 정상이다, 아니다의 경계선은 대체 뭔데요?.」 그 말에 또 허가 찔린다. 그래..물론, 서경도 겪기 전까지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의 일들의 대부분을 비정상이라고 치부해 왔다. 그러나 막상 스스로 겪게 되는 이 파괴감과 분노, 그리고 증오와 쾌감으로 엉망이 되는 순간 차가운 의문이 내내 심장을 들쑤신다. 정상과 비정상 지금 자신이 하는 건 어떤 것도 정상이 아니다. 이전에 가진 서경의 사고방식으로 볼 땐 절대 그렇다. 남자 녀석에게 놀아나고, 심지어 안기고, 그러면서도 끝내 짜릿함과 공허함을 깨달아야 하는..그런 건..절대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비정상이라고 또한 이전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건 스스로 벌려 놓은 결과를 비정상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자신은 갈 곳이 없어진다. 머리 속이 그래서 온통 백지화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저 뒤죽박죽 되어 버린 느낌이다. 「아무튼..이젠 그만해! 영화를 찍든 뭘 하든..니 마음대로 해. 대신....」 「......」 「....남자답게 협상하자... .... 니가 지금까지 찍은 비디오테이프랑 파일들 다 내 놔...」 「.......」 서늘하게 변해가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서경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S is... 를 찍게 해 줄게. .. 아니,.. ... 내가 진심으로 도와줄게........」 분노도 느껴지고 싸늘한 증오도 갖고 있지만, 지금의 서경에 필요한 것은 거리감일 뿐이다. 이 위험한 녀석에게서 벗어나고 싶고 멀어지고 싶은 차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자신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처럼 지치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눈매가 매섭게 변한 채로, 탄탄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진우는 말없이 쓰게 웃었다. 아이들이 총총이 뛰어 들어오는 놀이터의 낯익은 풍경이 어느 먼 날의 흘러간 영상처럼, 서경에게는 너무나 다른 세상처럼 다가왔다. 이 녀석이 왜 그렇게 S is...에 집착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아니, 하다못해 녀석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 자신 또한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생식적인 자극과 반응들..동물 같은 행위와 젖은 한숨들 언젠가 딱 한번 이성을 잃은 것처럼 짙게 변하던 녀석의 검은 눈동자.. 그런 것들만 기억한다. 녀석에 대한 것은 하나도 알 수 없고, 녀석도 자신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이제 이런 관계는 끝이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단호한 서경의 갈색 눈동자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마침내 진우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선배. 여전히 세상이 호락 호락해 보여요? 난 그래서 선배가 재수없어.. 도대체 당신이 뭘 알아?」 「.......!!!!!!!!!....」 비웃듯 끌어올려지는 미소가 차갑다. 「 이제와서 도망가고 싶은가 본데,.. .그럴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 봐요.」 「............」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녀석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긴 속눈썹이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인 표정으로 달콤하게 말한다. 그러나 내용만은 정말 싸늘하다. 「...영화도 찍을 꺼고.. 선배가 주연을 맡을 것이고.. 그리고나는 선배를 놓아 줄 생각이 지금은 없어요..........」 「........-!!!!!!!!....」 서경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하는 걸 보면서 진우는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선다. 선이 아름다운 서경의 턱을 움켜쥐듯이 손바닥 전체로 덮으며 그가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서경은 녀석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깨달았다. 검고 공허한 눈동자.. 「.....!.......」 문득 아슬 아슬한 소름이 목덜미로 확 퍼져갔다. 이 녀석과 위험한 놀이에 빠져든 직후부터 늘 서경의 마음을 괴롭히던 그 진공의 상태. 도덕적인 무(無), 아무 것도 마음에 담겨 있지 않은 그 메마른 영혼.. 왜 그 순간에, 다가오는 녀석의 검은 눈동자에서 짙은 욕망 대신 그것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다. S 에 대한 자신의 실험이 위험해 질수록, 서경은 늘 목이 말랐다. 속이 빈 것처럼 언제나 배가 고팠고, 그리고 온 몸에 한기 가득하게 추워지고, 그리고 목이 말랐다. 그러면서 점점 이 녀석과 같은 공범의식을 느끼는 자신을 깨달았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감정은, 자신의 치부를 모조리 알아버린 녀석에 대한 비겁한 매달림이다. 알면서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뭔가 다른 수를 만들어 낼 잔꾀도 없는 자신의 어리숙함을 저주하지만, 그 순간의 김진우는 유일한 공범자다. 그 녀석의 지독히 공허한 눈동자에 전율했다. 부르르.. 서경의 떨리는 턱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쓴다. 그 끝자락에 느껴지는 얄팍한 인간의 체온에도 서경은 금세 휘말려 버린다. 이것은 중독이다. 엄청난 충격으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치고 들어와서, 결국에는 십 몇 년동안 그려온 인생의 그림들을 하얀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비어버린 공허감 때문에, 그 허기와 지친 갈증 때문에 뭐라도 생각없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과 상식으로 꽉 찬 서경의 머리와 감정을, 녀석은 격하게 파괴하고 찢어버렸다. 몇 달 전까지의 이 서경 같은 건 없다. 속이 텅 비어 버렸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나 와서 거기에 싸인을 하면 그 사람의 것이 되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이 길들여진다는 것이고, 그 길들여짐에 중독당했다. 두근 금욕적이고 잘생긴 녀석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경은 주먹을 꽉 쥐고 떨리기 시작한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숨을 몇 번 들이쉬었다. 팔을 뻗어 녀석을 치면 이전의 이서경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냥 받아들이면 두렵도록 새로운 이서경만 남게 된다. 그는 그 짧은 순간 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단지 서경의 반듯한 얼굴 위를 미끄러뜨리듯 손가락으로 흩어 내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길래 처음부터 우기지 않았으면 좋잖아요? 왜 잘난 척을 해서 중간에 끼여들어요?」 「........-!!!!!!!!....」 「난 여전히 선배가 마음에 안 들고 그리고 재수없다고 생각하니깐.아직은 더 파괴해야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걸요?」 뜨거운 숨결이 바르르 떨기 시작한 서경의 목덜미에 내려앉는다. 이빨을 세우는 것처럼 예리하게 통증을 남기는 입맞춤이 목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읏-..하는 짧은 소리가 서경에게서 세어 나오고, 최근에 부쩍 창백해지기 시작한 피부가 붉게 달아오를 때 쯤, 녀석은 마치 물건을 팽개치듯 서경에게서 손을 놓았다. 그 순간에 미묘하게 혈관이 끓어오르듯 체온이 급하게 상승했다. 약간 겁에 질린 것처럼 혹은 동공의 커다란 원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처럼, 서경의 숨소리가 가빠진다. 그는 가빠오는 숨결 속에서 겨우 입을 연다. 「.....나 역시.. ...........니가 싫어. 경멸....해.......」 삐그덕.. 오래된 그네가 소리를 낸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아 녹 슨 것이다. 인간의 감정 같이 일그러진 소리다. 이건 사람을 믿는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거다.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에 대한 분노다. 1. 맙소사라고 기연이 주저 앉듯 허물어졌다. 그는 늦게 하교하는 길이었고, 자정 까지는 편의점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편의점 알바는 근 5개월 동안 계속된 것이다. 그리고 싸늘한 감정이 뒷덜미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그는 누가 잡을 사이도 없이 편의점 가판대 앞에서 몸을 숙이듯 앞으로 기울었다. 진우가 찾아온 내내 가슴을 통과하던 이상한 날카로움. 그 몸을 찔리는 듯한 살기 가까운 적의감. 녀석은 2년 가까이 마주한 후배다. 그런 녀석이 쓸데없는 오해로 적의감을 가질 리는 만무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기연은 계속 생각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에 주연을 맡으라는 뚱딴지 같은 말만 던지고 악당처럼 웃었다. 「야, 유기연! 왜 그래, 어디 아파?...」 편의점에 찾아온 수완이 놀란 듯 어깨를 부여 잡는다. 그도 기연이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수완은 단지 기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영화 동아리를 떠난 녀석이 대뜸 전화를 해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정말 난데없이 김진우가 자신을 주연으로 말했다고 전했다. 궁금증 때문에라도 수완은 시나리오를 들고 편의점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물론, S is...를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좀 요란했다. 수완도 처음에는 적잖이 놀랬고, 이 서경은 아직도 길길이 뛰며 진우와 접전 중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처음 보았다. 시나리오의 마지막까지 채 다 읽기도 전에 유기연은 앞으로 쓰러지듯 주저 앉는다. 대본을 쥔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물론 좀 놀라긴 했겠지만..기연아..이건그냥......」 수완이 달래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반듯하고 지적인 남자 유기연의 머리 속은 색깔 다른 이야기들이 그저 윙윙거린다. 그는 대본을 손아귀에 쥐고 긴 한숨처럼 신음을 토해냈다. 위가 아픈 마냥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이었다. 2. 마침내, 영화가 결정났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동부서주하며 스토리 보드와 스틸을 준비하던 녀석들도 모두 제 자리를 잡아 간다. 누가 유기연을 다시 영화 판에 불러 들렸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 3이 된 이서경이 왜 다시 주연을 맡을 수 밖에 없는가도 사실 별반 중요치 않다. 동아리의 다른 녀석들에겐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크랭크 인에 들어가면 다들 정신이 없어질 테지만, 40분 짜리 단편 영화 하나에 목숨거는 그들의 처지라서, S is..건 A is건시작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다. 제작 감독은 시나리오를 썼던 진우가 맡았다. 촬영감독을 수완이 맡아서 2학년들을 후리고 다녔고, 서경은 솔직히 요새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가 하는 일은 촬영장에서 새침하게 앉아 있거나, 어딘가 좀 멍한 표정으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밖엔 없었다. 다시 바쁘게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촬영되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환경에 따라 촬영 순서를 정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주말마다 새로운 촬영을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영화를 시작한 이례로 서경은 다소 안전했다. 일단은 너무 바쁜 나머지 진우 녀석도 자신을 찾는 일이 없었고, 서경 자신도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었을 때, 싸하게 눈이 마주칠 때 빼고는 서경의 심장도 안전했다. 진우 녀석이 일 잘하는 거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메가폰을 쥐었을 때의 모습이란 거의 독재자에 가까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부드러운 독재자인 것이다. 그는 항상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눈빛만은 정곡을 찌르듯 날카롭게 빛났다. 결국에는 상대에게 비난 들을 일 없이 뭐든지 마지막은 진우의 스타일대로 확정된다. 그리고 모니터를 쏘아보는 그 표정만은 정말 무서웠다. 너무나 차갑게 이성적인 얼굴이라서 늘 무심해 보이는 눈빛에도 일순, 서경은 싸하게 긴장하곤 했다. 아직까지는 촬영의 초반이고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다. 서경은 자신에게 뭔가 열중할 꺼리가 생겼다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3. 그리고 서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S is...는 괜찮은 영화였다. 봄 중반의 토요일 오후에, 서경은 학교 옥상에 앉아 기획팀과 촬영팀이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촬영의 20% 쯤을 마친 영화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흘러갔다. 동아리 선배로부터 온 안부와 염려의 전화를 받으며, 서경은 다소 희미해지는 정신을 챙기려 애쓰고 있었다. 봄볕을 받으며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던 까닭이다. 이번 씬은 옥상에서 만난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벌이는 탐색전 같은 씬이다. 「씬 8을 찍을 시간이야. 선배님들 준비하세요! 」 진우가 나른하게 소리쳤다. 말이 소리쳤다는거지, 사실은 보통 때보다 조금 톤이 높았다..라는 정도다. 서경은 전화를 가방에 넣은 다음,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순간 어지럽다. 아무래도 어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공부와 영화..둘 다를 잡으려 노력했던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야, 이 서경! 너 교복 단추 어떻게 했어?」 그리고 옆의 여고에서 도와주러 온 경숙이 호들갑을 떤다. 그러고 보니 학교 씬은 오늘이 처음인거다. 학교 씬을 찍을 때는 교복을 입는 게 당연한데, 셔츠의 단추가 하나 없다는 것을 내도록 잊고 있었다. 자켓을 걸칠 때는 상관없지만, 지금처럼 따뜻한 날에 그 차림은 너무 덥다. 「아.....」 목에서 없어진 첫번째 단추를 의식하며 서경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깜박했다. 그 놈의 단추는 예전에 진우의 집에서 잃어 버렸다. 「그냥 가요.」 경숙의 호들갑을 진정시키듯, 녀석이 마침 웃었다. 그는 촬영이 들어가는 맞은 편에 서 있었는데, 분장을 도와주러 온 경숙과 계속 이야기 하던 중이었다. 옆 학교인 **여고에도 영화 동아리가 있다. 물론 서경의 학교 동아리보다 역사는 짧지만, 서로 배우를 교환한다든지, 촬영을 도와주는 일이 잦았다. 특히 본격적으로 영화 촬영에 들어가면 거의 한 학교인 듯 같이 움직인다. 여학생이 필요한 씬도 있고, 남학생이 필요한 씬도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다. 「서경아....」 단추 없이 그냥 찍자는 진우의 말을 들으며, 서경은 또 습관처럼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조금 푼다. 이렇게 느슨하게 매면, 단추가 없는 자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 쯤에 문득 기연이 조금 찌푸린 얼굴로 말을 건다. 의례히 있을 대사 연습이려니 하고 고개를 치켜 들었다. 아찔..또 순간 어지럽다. 「이거 끝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러나 기연은 마치 귓전을 스쳐가듯 재빨리 말한다. 그리고 순간적인 방어처럼 곁눈질로 살짝 진우를 훔쳐보며 말했다. 묘한 궁금증이 서경에게 일어났다. 그 찰나에, 진우가 액션을 외쳤다. 다시 촬영의 시작이다. 아마 기연이 하려는 말은 다음 주에 있을 키스 씬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 주 토요일 늦은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키스 씬을 찍을 예정이니 말이다. 4. 「진우 녀석..도대체 어떤 녀석이냐?」 8 번과 20번 씬을 차례대로 끝내고, 밤 늦게야 녹초가 되서 헤어진다. 몇 번이나 같은 씬을 찍어야 했다. 아주 김진우의 완벽주의적 기질은 정말 사람 돌게 만든다. 대충 하는 것은 서경도 싫지만, 이렇게 피곤한 것도 싫다. 「뭐?」 그리고 기연이 하는 말을 놓쳤다. 서경은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기연을 돌아본다. 잃어버린 단추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못했다. 그 바람에 오늘 NG 도 많이 생겼다. 특히나 영화 내용 자체가 두 고등학생의 동성애적인 내용이다보니,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의식이 된다. 단추를 잃어버린 날 처음으로 성적인 관계가 있었다.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된다. 자신이 동성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이 문란한 것도 아니고, 그건 그냥 너무나 과도한 실험 중에 일어난 사고와 같다. 도착한 지하철을 타는 순간, 그 혼자만의 생각에 일침을 가하는 유기연이다. 뭐? 키스 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야, 이서경..너 요새 정말 왜 그래? 어디 아퍼?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너?」 「남자랑 자면 기분이 어떨까?」 그 순간, 기연의 얼굴이 서경만큼 하얗게 질린다. 뭐, 보통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거지, 너무 정색을 하고 곤란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기연 정도의 능청스러운 성격이면 잘 대답할 줄 알았는데,그냥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 본건데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해? 너도 S is...에 너무 많이 빠졌냐?」 「아니..그냥」 「그럼?....」 「넌 S is...가 좋아? 그 영화 찍는데 아무 거부 반응도 없어? 」 얼버무리려는 서경의 빠른 질문에 기연이 조금 안도한 기색으로 웃었다. 하긴 기연이라도 딱히 그 기분을 어찌 알겠는가..서경은 스스로 생각하며 달리는 지하철의 밖을 내다보았다. 터널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다. 「서경아..사실은....」 그리고 기연이 머뭇거리며 뭔가 말하려는 표정이다.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서경에게, 녀석은 몇 번이나 주변을 살피듯 고개를 돌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포기하는 듯한 시선이 되더니 이내 다시 S is...에 대한 이야기로 입을 연다. 「모르겠어... 진우 녀석이 영화에서 뭘 말하고 싶었는지 아직은 모르겠어 동성애인지....파괴적이고 지독한 관계인지.. 것도 아니라면탈출구도 없는...그냥 격렬한 감정들인지 .. 나도 모르겠어.」 서경의 밝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기연이 쓰게 웃었다. 녀석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일학년 때부터 녀석은 심란하면 서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기연이 빠르게 덧붙였다. 「난 안 그랬는데.. 요새 부쩍 그런 기분이 들어. 내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말야 S is...의 주인공들이 이해가 가. 걔네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했는데.. .그나마 포기한 것들이 둘이라 나은 거야. 서로 비슷한 것들끼리 만나서.. .. 섹스를 하든 뭘 하든감정을 나누는거니깐.. 우리가 대개 말로 뭔가를 표현한다면S is...의 녀석들은...... 말이 아니라 다른 걸로 서로를 나타내려고만 해..그래서..격렬해 보이는 거 아닐까..」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서경을 스쳐간다. 그래..그런 거구나.. 기연이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꼭 그랬다. 내일이 없다는 생각.. 이전에는 하루 하루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처럼 살았는데, 근래에는 뭔가 달라졌다. 결국 진우에게 휘말려 버린 건가..라는 자조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이 머리 속을 점령한다. 마지막에는 자신도 S is...를 이해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작게 소곤거리듯, 서경이 입을 열었다. 「나는요새.. 내가 아닌 것같아.. 그런데....나는 점점 비워지고.. 속에 아무 것도 없는 빈병처럼 되어 버려서.. .. 꼭 껍데기만.....돌아다니는 것 같아.. 인형이나..귀신처럼 말야...... 「마음이 없어서....그래... . 몸은 살아 있는데..마음을 잃어버려서 그래.」 서경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아주 작게 표현했는데, 문득 기연이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하철이 다시 터널로 빠르게 들어선다. 덜컹..문득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쳐다보았다. 친한 녀석인데도 처음 보는 듯, 생소한 기분이 든다. 자신이 아는 기연은 굉장히 쿨(cool)한 녀석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로 '내일이 없다'라는 벽에 부딪칠 리 없는 녀석이었다. 문득, 녀석이 휙 시선을 피해버리는 그 이면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녀석은 S is...를 찍는걸까. 지 입으로 영화를 중단하겠다고 말했었는데 더 묻고 싶었지만, 서경은 그 순간 그저 입을 꾹 다문다. 그것은 기연 쪽도 마찬가지 인 듯 보인다. 키스 씬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세상이 터널 그 자체가 된 기분이었다. 5. 토요일은 모두에게 꿈 같은 날이어야 한다. 그러나 서경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하다. 그는 마치 시간을 끄는 것처럼 미적거리며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단추 찾으러 집으로 와요.」 동아리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서경을 향해 진우가 말했다. 촬영을 시작하려 얼른 빠져나가려던 서경이, 그 순간 공격을 받은 것처럼 부들거린다. 셔츠를 갈아 입는 손길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캐비닛을 열고, 그 문 사이에서 옷을 갈아 입기 때문에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낮은 목소리 만으로 쉽게 긴장했다. 서경의 대답이 없자, 문득 그가 조금 웃기다는 표정으로 가로막힌 캐비닛을 쾅 하고 닫는다. 그 바람에 단추를 꿰던 서경이 우뚝 멈춰 선 채,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단추....필요하지 않아요?」 진우는 닫힌 캐비닛에 기댄 채, 가만히 웃는다. 그는 서경이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잔뜩 사내를 원하는 몸으로 길들여 놓고는, 아주 맛을 들이기 전에 재빨리 영화로 밀어 넣은 것이다. 물론, 그 쯤에 서경이 그만두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일종의 체벌이었다. 기연이 자신의 이야기 인 듯한 영화 'S is...'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수 밖에 없듯이, 서경도 그 영화를 통해 날마다 시험 받는 것이다. 연기라는 것은 때로 억눌린 감정의 분출구다. 서경은 S is...라는 영화 때문에 욕구를 외면 할 수가 없었다. 반면, 기연은 같은 영화 때문에 짓이긴 듯한 죄책감을 떠 안아야 했다. 진우는 서경과 같이 자신의 본능을 잘 억제하며 살아온 사람이, 한번 길들여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서경의 몸 안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가 아닌 듯한 새로운 감각이 매일 고문을 해 댈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서경에게 했던 다소 가학적인 자극은, 서경 안에서 새로운 욕구가 튀어 나오게 하는 스위치와 같은 것이다. 지금의 표정만 봐도 그렇다. 「꺼져....니 얼굴만 봐도 토 나와.」 여느 때처럼 다부진 목소리.. 그러나 부드럽게 떨리기 시작한 속눈썹. 셔츠 깃을 꽉 움켜 쥔 듯한 방어자세. 허나, 눈동자는 바둥거리는 것처럼 난감한 갈증에 허덕인다. 발정이 난 사랑스런 애완동물처럼 가쁜 숨소리다. 붉게 열려진 이쁜 입술에서 감질나게 색색이며 진우의 손가락을 피하려 고개 돌렸다. 이건 반응이다. 자극에 대한, 중독에 대한 반응이다. 서경 자신도 몸서리 쳐 질 정도로 짜증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쾌감에 대한 반응이다. 진우의 마지막 계획은 간단했다. 서경의 색기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 되면, 자연스럽게 기연이 서경을 안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연은 동성애자 이고, 무엇보다 서경을 좋아한다. 진우의 마음조차 들썩이게 만드는 이 강렬한 유혹에 기연이 넘어가리라 확신한다. 기연이 서경을 안는 장면을 공개할 생각이다.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범죄를 까발려야 할만큼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서경은 이 일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유기연과 같은 인간과 친하게 지내며, 아무런 생각이나 깊이도 없이 헤헤 거리기만 할 줄 아는 잘난 척이 꼴보기 싫다. 누군가를 이용해 먹는다는 것이 끝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우는 열 네 살 때 이미 세상을 알았다. 세상은 순수해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서경이 아무런 장애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그 정신머리로는, 세상을 견디지 못한다. 때로는 이용당하고, 또 때로는 이용해 먹는 것이 삶이다. 그것이 김진우 식의 삶에 대한 정의다. 이서경은 나이만 먹었을 뿐 철부지다. 적자생존이라고..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서경이 김진우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좀 더 세상을 배우든지, 혹은 그렇게 발끈하는 기색을 줄이는 게 상책이었다. 간혹 곤혹스럽게, 때론 교태 어릴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이 파괴감을 자극한다. 잘난 척 하는 도도한 얼굴을 볼 때마다, 한대 때리거나 그보다 더한 상처를 주고 싶다는 가학심을 부추긴 것이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다. 그는 김진우에게 좋은 먹이감이고, 덫에 걸린 먹이를 놓치는 바보 같은 사냥꾼은 없다. 특히 그가 배 고픈 사냥꾼일때는 말이다. 「12번 씬 촬영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소 가득한 관찰의 눈빛으로, 한 사람은 도망치는 듯한 필살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후배 하나가 끼여 들었다. 옥상에서 있는 12번 씬에 대한 알림이다. 서경이 부리나케 걸어 나간다. 아마도 그 순간에는 후배 녀석이 일종의 구원과도 같았다. 간단히 머리를 빗고, 경숙이 대충 바르는 파우더가 귀찮은 듯 머리를 젓다가 레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엑아무리 생각해도 토 할 것 같아.. 사내 새끼들이 키스가 다 뭐야..우웩.」 1 학년 한명이 그 순간 너스레를 떤다. 문득 주변이 찬물을 맞은 듯 침묵으로 휩싸였다. 문제의 키스씬이 있는 날이다. 물론, 서경은 기연이 눈치껏 하는 척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배우들보다 주변 녀석들이 더 긴장한 기색이다. 여태껏 의례히 장난삼아 키스질 해 대는 녀석들이건만, 턱 밑이 가뭇 가뭇한 이 조숙한 후배는 정말 위가 쏠리는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다. 그 바람에 대사를 마구 중얼거리던 서경은 땅바닥에 굳어 버렸다. 그럴 꺼 까지 있나....정말 하는 것도 아닌데....... 「나가.」 배우가 긴장하면 끝이다. 아무리 하는 척이라 하더라도 배우가 적당히라도 몰입을 해야지, 대충 연기하는 게 표가 나면 절대 끝이다. 배우 뿐만 아니라 스탭들 중 다수가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그들 중 몇은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곤란한데.라고 서경이 생갔했을 무렵, 누군가 그 정적을 깨고 낮게 말한다. 「나가.」 서늘한 목소리. 짧은 순간에 상대방을 헤집는 듯한 차가운 음성. 「선배.....」 서경과 기연이 키스하는 씬에서 토할 것 같다고 오버한 녀석이 눈을 깜박인다. 그는 반사판을 드는 덩치 좋은 놈이다. 그 녀석이 없으면 조명이 안 되는데, 일순간 모두의 눈이 쏠린다. 그러나 진우는 그늘에 기댄 채, 감정없는 말투로 다시 말했다. 「꺼져.」 여간해서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하지 않는 김진우다. 아니, 서경은 그의 원래 모습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전혀 모른다. 그것은 마치 김진우가 서경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했듯이 서로에게만 있는 은밀한 모습이다. 간혹, 영화를 찍는 동안 진우의 험악한 감정들이 드러나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선으로만 통제되는 범위였다. 그러나 , 이 쯤되고 보니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진우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까지 제작감독을 맡았다. 3학년이 빠지고 나면, 그가 짱급이다. 아무도 막질 못하는 거다. 1 학년 후배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가 죽은 표정으로 반사판을 내려 놓는다. 진우가 옆에 있던 미술부 녀석에게 턱을 내밀 듯 방향을 가리킨다. 니가 대신 들어라..라는 의미와도 같다. 불만을 말했던 녀석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 얼음 같은 표정으로 진우가 입을 연다. 「선배건, 후배건.. 장난으로 하는 거면 다 나가. 선배라는 이름으로, 후배라는 이름으로..어색하게 마음에도 안 드는 영화 찍을 필요 없으니깐.. 다 꺼져.」 곁에 있던 수완이 마른 침이 꿀꺽 삼킨다. 마치 이를 가는 듯한 그 얼음장 같은 한 마디에, 서경은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습기가 눅눅하게 배인다. 이쯤되면 서경이나 기연이 알아서 진우를 말리리라 생각했는데, 둘 다 아무런 미동도 없다. 서경은 기연에게, 기연은 서경에게 서로 의아했지만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수완이 다가와 서경의 등을 살짝 친다. 긴장을 풀라는 신호다. 아무리 저렇게 이야기 해도, 진우가 감독이라는데는 변함없다. 한번 영화가 진행된 이상은 선배들도 그를 말릴 수 없는 거다. 「이 중에서 동성애가 싫은 녀석들은.. 격렬한 게 싫은 녀석들은..잔 말 말고 다 꺼져.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파괴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거니깐.. 순수하게 이슬만 먹고 영화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다 나가도 좋아. 어디 착한 어린이들만 사는 도덕적이고 훌륭한 세상 마음대로 만들라구.. 나는 그 도덕에 찬성한 적 없어. 니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상식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태어났고,....동의하지 않은 생각들에 따라 살 마음이 전혀 없어.」 그리고 정말 한번씩 나타나는 그 불량스러운 미소가 녀석에게 새겨진다. 금욕적으로 보이는 입술의 왼쪽 끝만 살짝 비틀어 웃는 그 미소. 나른하게 웃는 듯 하지만, 잔혹할만큼의 차가움이 담긴 그 시선.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녀석이 유유하게 웃듯 덧붙였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당신들 마음에 드는 세상에서만 살아. 나는 여기 남아서 내 식대로만 살 테니.. 어떤 상식들은..때론 공격적인 편견이다. 나는 저질이건 뭐건 간에 내가 만들어 낸 세상이 좋아. 원치 않는 사람은 꺼져.」 「.....-!!!」 그 순간의 엄청난 악마적 짜릿함이 서경의 신경을 건드린다. 상상할 수도 없고, 경악스러울 만큼의 타락적인 쾌감이 전율하게 만들었다. 소름이 돋는 듯한 강렬함이다. 타락하고 싶다라는 격한 욕구였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천사만큼이나 악마에게 빠져드는지 알 것 같았다. 사악한 속성이란 발 뺄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다. 악마가 자신을 향해 웃듯이 시선을 옮긴다.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옥상의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환경이었지만, 묘한 오싹함에 서경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어 버린 마음의 중앙에 주리를 틀었다. 마치 붉은 뱀의 혀가 날름거리듯, 저속함의 욕망이란 거세게 무(無)를 잡아 삼킨다. 이브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는지, 그 순간 이해했다. 6. 그리고 촬영은 이어졌다. 키스 씬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이보다 더한 씬들이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 정사를 표현하는 씬에 앞서 키스라도 먼저 찍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서경은 위안한다. 「니가 한 짓을 알고 있어.」 기연이 대사를 말했다. 서경이 맡은 역은 S is...에서 '계수'라는 이름이었다. 조금 떨리는 시선을 들어, 기연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연이 맡은 '석현'을 바라본 것이다. 계수와 석현이 S is...의 주인공이었다. 적어도 연기를 하는 입장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기연이나 서경이라는 존재는 여기에 없다. 이 순간에는 계수와 석현만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키스하는 척이든 키스든 어느 쪽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 난 아무에게도 이해 받고 싶지 않아.」 영화 속의 서경이 말했다. 조금 떨리는 듯한 기분으로, 그리고 이 영화를 찍는 동안 한번도 없는 싸늘한 전율로.. 바로 다음이 키스씬이다. 이번에는 모두 군말이 없다. 그러나 그 반항하던 후배를 생각하니, 문득 혀가 단단하게 굳는다. 기연이 서경의 교복 넥타이를 확 낚아채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반사적으로 손길이 먼저 간다. 퍽-하는 짧은 소리가 기연의 가슴 쪽에서 울렸다. 억지로 하는 것 같은 키스였는데, 정말 억지로 하는 게 되어 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겹쳐지고, 오랜 친구 녀석에게 입맞춤 당한다는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아무리 그래도 진우 녀석..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라는 울컥한 마음이 솟아났다. 그리고 저 쪽에서 단호하게 「컷!」 하는 소리가 이미 들린다. 실패다.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가능한데,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건 진우 녀석처럼 작심하고 괴롭히겠다는 의도도 아니고.. 녀석처럼 어떤 관계도 아니니 서로 등 돌리면 되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연기라도 키스하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들지 감당이 안 된다. 「컷!」 그리고 다시 컷이 울린다. 또 실패다. 같은 각도에서 미묘하게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기연의 손길이 좀 거세졌다. 화가 치민 서경이 휙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못하겠다. 「그것밖에 안 돼요?」 한심하다는 듯 웃는 녀석의 모습이 들어온다. 아마, 저 녀석의 내부에 숨어 있던 그 악마적인 기질도 어느새 튀어 나온 것이다. 아까 영화에 대해 함부로 말하던 후배 때문에..그리고 이 연기가 지지리도 안 되는 서경에 대한 답답함으로.... 성질이 잔뜩 담긴 것 같은 싸늘한 눈동자를 쳐다보며, 서경이 한숨을 쉰다. 기연이 함부로 잡아당긴 바람에 풀어헤쳐진 넥타이를 고쳐 맨다. 이렇게 모두가 기다리는데, 제대로 안 나오니 미칠 지경이다. 기연이 긴장을 풀어주듯, 갑자기 서경의 허리를 꽉 잡아 당긴다. 「다음에 하자, 김진우.」 아마 모두가 그 순간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슴 안쪽을 답답하게 죄여오는 숨덩이가 툭..하고 밖으로 세어 나온다. 「이 서경 선배님..잠깐만요.」 그리고 녀석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힐끗 자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느 틈엔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서경은 손목을 잡힌 채 끌려 나왔다. 그렇게 힘이 없는 몸도 아닌데, 녀석이 다가오는 순간 이미 새파랗게 질려 버린 것이다. 쿠-ㅇ 비어 있는 동아리 실에 들어오자마자, 등뼈가 부스러질 정도로 팽개쳐 진다. 쿠-ㅇ..하고 알싸하게 귓전을 때리는 충격의 소리다. 서경이 새근거리며 녀석을 노려보자, 그 녀석은 마치 좀 전의 표정이 얼마나 경고였는지를 알려주듯 씩 웃었다. 역시..사람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미소다. 「이 서경......」 아. 짧고 마른 신음이 서경에게서 튀어 나왔다. 앞머리를 강하게 낚아 채는 바람에 턱이 떨리며 고개가 들어진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당혹스러운 얼굴에, 진우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손가락으로 선을 쓰다듬는다. 저녁 햇살이 동아리 방의 커튼을 헤치고 들어왔다. 기묘하도록 몽환적인 느낌이다. 그 순간 만큼은 왠지 감미로울 정도로 뜨거운 손가락이었다. 진우는 그대로 서경의 반듯한 이마에서 손을 미끄러뜨린다. 아치형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 오똑한 콧날, ... 그리고 보드라운 깃털 같은 입술을 하나 하나 흩듯이 매만지며 녀석이 귓전에 숨을 뱉었다. 훅..하고 서경이 일순 떨리는 눈동자로 굳어 버렸다. 뜨거운 숨결은 예민한 귀에 자극으로 다가온다. 「난 선배가 어찌 되든 상관없어.」 「...-!!!!!!!!!.....」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건장한 몸 때문에 서경은 완전히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쉽게 저항하거나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그대로 높은 열이 발바닥부터 차례대로 올라온다. 발갛게 물드는 서경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녀석이 귓전에서 음산하게 웃었다. 웃음 소리에 싸르륵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하지만 선배가 내 영화를 망치는 건 용서가 안 돼.」 「!!!!!!!!!!..」 「키스를 하라구..이 서경. 무슨 말인지 알지?」 욱..하고 복부에 힘이 들어간다. 서경은 그 막중한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와락 소리를 치고 말았다. 「너 같으면 하겠냐..이 새꺄!!」 그러나 끄덕도 없이 서경이 치켜세운 갸름한 턱에 녀석이 입을 맞춘다. 물기 섞인 소리 때문에 신음이 흘러 나올 것 같은데, 녀석은 여전히 턱선을 가누듯 입맞추며 스산하게 키득거렸다. 「못할 거 없지..앞으로 그 보다 더 한 것도 시킬텐데」 협박 같은 그 말에 순간 하얗게 안색이 변한다. 부들거리는 서경은, 초조하게 입술을 열어 겨우 따질 수 있었다. 「그 녀석은 내 친구야..난... .....친구랑 그렇게 못 해.」 「나랑은 했잖아? 위선자... 울기까지 하면서........그 정도로 좋아했잖아?」 그래..솔직히 말하자.. 솔직히..까 놓고 말해서.이제 그 악랄한 욕구에 물들어 간다고 인정한다. 인정한다. 백번 말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극에 따른 반응이다. 그거와 이건 다르다. 서경은 눈물이 날 정도로 억한 기분으로 녀석을 똑바로 쏘아보며 외쳤다. 「그러니깐 못 한다구!!!..이 개새꺄!!!!!!!!!! 너랑은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 녀석과 너 따위가 어떻게 비교가 되냐?!!! 기연이는...내 친구란 말야!!!!!!!!!」 그리고 움찔... 서경은 갑자기 더 울고 싶을 만큼 몸을 움추린다. 한순간, 뭔가 지독한 것이 녀석의 눈동자로 지나간 것이다. 빠르고 소리없는 그것은, 밑바닥도 없을만큼 커다란 절망이었다. 이전 같으면 절대 몰랐겠지만, 지금은 똑똑히 알고 있다. 녀석도 지금의 자신처럼 완전히 비어있는 눈동자를 가지고 산다. 감정이 없고, 영혼이나 마음 같은 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그런 웃기는 절망. 그런데도 서경의 마음이 순간 징-하고 울렸다. 갈비뼈의 빈 공간으로 아픈 바람이 스쳐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녀석은 그 표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오히려 서경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럼. 유기연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거야 말로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이니깐.」 「..하..하지만....읍-!!!!」 뭔가 더 말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가차없이 날카로운 입맞춤만 파고든다. 순간적으로 녀석의 몸에 갇힌 채 바둥거렸지만, 그 엄격한 침입은 더 짙게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을움켜쥔 채 흔들어 버렸기 때문에, 뒷통수가 그대로 문에 받쳤다. 얼얼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고통같이 팍팍한 입술이 자신을 괴롭힌다. 「...아-....」 희미한 소리가 세어 나왔다. 녀석이 자신을 벽에 꽉 붙인 채, 한 쪽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허리를 감싸 안게 만든다.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틈도 없이 밀착된 근육에서 일순 휘말려 간다. 안 그래도 요새 색스러운 몸이다. 각도를 바꿔대며 찌르듯이 파고드는 키스의 격렬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그.....그만.....」 애원은 가장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 녀석은 자신을 울면서 애원하게 만들기 위해 고통스럽게 도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경은 달아나고 싶었다. 이 난데없는 키스 때문에 정신이 음란하게 출렁인다. 녀석의 혀가 구석 구석 탐닉하듯 입 안을 쓸어갔다. 몇 번이나 달래는 듯한 키스 끝에는 항상 참을 수 없는 가학적인 체벌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키스만을 위한 행위는 처음 받아본다. 더군다나 그 때는 전희에 불과한 입맞춤이었기에, 절박함이나 격렬함보다는 그저 부추기려는 의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으응......」 갑자기 탄식 때문에 숨이 꽉 막힌다. 입맞춤을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안 것이다. 혀와 혀가 격렬하게 얽혔다. 사정의 기운처럼 머리 속을 태우는 듯한 뜨거움이 신경을 건드린다. 녀석의 타액이 서경의 미숙한 반응 탓에 턱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깨달을 사이도 없이, 마구 잡아먹듯 입안이 녀석으로 가득 찼다. 「제....발.........」 거의 본능적으로 서경이 신음했다. 스스로도 말리려는 건지, 애원하려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갈라진 음색이다. 숨이 막혔다. 입술을 물어뜯고 입안의 예민한 점막을 덮쳐오는 야한 격함에 숨이 막혔다. 간신히 호흡을 몰아쉬며 겨우 꽉 잡은 것이 녀석의 셔츠 깃이다. 어지러울 정도의 관능이 체온을 타고 흘러들었다. 아!... 마침내 울 듯 말 듯, 묘한 소리가 벅찬 숨을 타고 세어 나온다. 몇 번이나 문에 머리를 박듯 녀석의 거센 속도에 잡아 먹혔다. 온통 하얀 피부가 붉어지고, 어쩔 수 없이 매달리듯 키스를 나눈 후에야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는 녀석도 지금 막 정사를 끝낸 것처럼 야해 보였다. 「너..-!!」 아랫입술이 마구 떨린다. 녀석 때문에 느낀 긴장감이나 증오 탓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갈증 때문에 떨린다. 누가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둘다 흐트러져 있다. 녀석이 흐트러진 걸 딱 한번 봤다. 그 때는 이렇게 바라볼 틈도 없이 등을 돌렸는데, 갑자기 녀석에게서 밀려오는 깨끗한 세탁세제 향에 욕정이 발한다. 검은 유혹은 정말 색스럽다. 진우 역시 가파른 숨을 삼키듯, 잠시 말을 잃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을 손등으로 쓱 쓸어 내며,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옷깃을 조금 다듬는다. 어딘가 모르게 복잡한 표정이다. 그 때딱 한번 녀석이 자신을 안았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아마 그리고 나서 더 차가워졌던 것 같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서경은 그 뜨겁던 열이 모두 혈관을 빠져 나간듯, 급속히 식고 말았다. 두근.. 아무리 보아도 검은 욕망이 가득찬 눈동자였는데, 이내 냉랭해 진다. 뭔가 자신을 향해 상기시키듯 복잡하던 그 표정 뒤엔 또 금세 본래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녀석이 마침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 기연과.」 「.....」 「이렇게 하는 거야. 이 서경.. 가르쳐 줬잖아? 이제와서 새삼 무슨 도덕적인 척 하고 굴어?」 「!!!!!!!!!」 귀가 멍멍하다. 그리고 뭔가 질끈거린다. 서경은 결코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 싸늘한 말투..냉정한 어감뀉늘 버릇처럼 짓는 비아냥의 표정. 「더 망쳐지라구요..선배. 깨끗한 척 하는 거..정말 못 봐주겠어. 친구라서 못 한다구? 」 「닥쳐」 「친구는 개나 주라 그래. 그 새끼는 선배를 좋아해. 나랑 했듯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구. 친구? 우정? ..하.. 마음 같은 건 필요없어. 몸만 즐거워도 그게 어디야?」 「닥....쳐.!!!!!!!!!!」 「선배는 천사가 되기엔 이미 너무 야한 몸이고.. .....그렇다고 악마가 되기에는 너무 쓸모가 없어.」 그리고 녀석은 걸어 나갔다. 휙..문에 기대여 있던 서경의 어깨를 떠밀며, 마치 거추장스럽다는 듯 짜증난 기색이다. 오싹.. 한기가 모든 곳을 파고 들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이니깐.. 뭔가 마음을 엿볼 수 있을 틈이라도 생기면 재빨리 더 잔인해진다. 서경이 발악을 할수록 녀석은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난다. 당신이 원하는 건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아마 사람을 상처 입히는데, 이만한 방법도 없을 것이다. 키스든 뭐든 어쨌든 좋다. 기연이 말한 것처럼.. 말로 하지 못할 것이라면 뭐든지 서로 교감하는 것도 나쁜 게 아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내부에서 감정과 영혼을 싹 빼간다. 빈병만이 남았는데,..그 병을 발로 차면 금새 깨지리라는 걸 아는데... 오늘 금이 갔다. 그 틈새로 찬 바람이 토할 것처럼 밀려 들어온다. 아무리 사람을 믿는 서경이라 할지라도 이 순간에는 완전히 부서진 기분이었다. 7. 「컷!」 진우가 쥐고 있던 대본책을 집어 던졌고, 그리고 키스 씬이 끝났다. 너무나 건조하고 삭막하게..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끝나버린 키스였다. 조금 전의 격정 같은 것이 남아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진우의 말 때문에 거의 돌아버려서 끝내버린 씬이다. 「....?」 기연이 의안한 표정으로 입을 가린다. 저녁으로 해가 완전히 기운 까닭에, 노을이 뉘엿하게 서경을 비췄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잔뜩 부푼 채 익어 있다.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그냥 뭔가 서경에게서 묘하게 바뀌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연 쪽에서도 기묘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사람들이 지켜 보는 것....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서경이었지만, 흥분이 된다든가, 뭔가 다른 의미가 느껴지진 않았다. 의례, 연기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연도 수없이 키스해 봤지만, 이렇게 기계적인 키스는 처음이다. 똑같이 혀도 얽히고 기연이 놀랄 만큼 능숙하게 반응해 오지만, 그 안에 이상한 주저가 숨어 있었다. 그냥 연기일 뿐인데....기연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서경을 힐끗 쳐다본다. 「.!!!!!!!!!!」 그리고 쿵.. 갑자기 마음이 곤두박질친다. 원래 서경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거의 2년 반이 넘도록 붙어 다닌 친구인데..이렇게 야한 얼굴을 정말 생소하다. 얼굴을 겨우 떼어 내고, 진우의 집에서 잘라내는 듯한 '컷'소리가 들렸다. 서경은 그 때 입술을 씹듯 가늘게 물고 있다. 마치 조금 전 기연과 했던 키스씬이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것처럼, 악이 받친 얼굴이었고, 독기 같은 것이 아른거리다. 그만큼 정염에 휩싸인 것 같아 그 모습이 이상하게 색스러웠다. 촉촉하게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관자놀이가 더욱 그렇다. 기연은 문득 눈동자를 어디 둘지 몰라 황망한 기분이 든다. 「....휴....」 그리고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다 같은 사내놈이려니 하면서 촬영하던 스탭 중에 하나다. 그가 한숨을 쉰 건, 키스 씬 때문이 아니라 키스가 끝난 뒤의 서경 때문이었다. 눈동자가 아플만큼 유혹적이다. 고만 고만한 놈들 사이에서, 하얀 셔츠를 입은 서경의 물오른 듯한 색기가 갑자기 눈에 띈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반반하긴 해도 그냥 그런 생김새다. 유독 다른 점이 있다면 눈매와 눈동자의 차이점인데, 평의하기 그지 없던 그 시선에 감감한 색(色)이 비췬다. 바람이 불어 서경의 셔츠 자락이 잠시 펄럭였다. 그 낭창한 몸의 선이 한순간 드러나자, 같은 놈이 다시 한숨을 쉬며 아예 시선을 돌린다. 심지어 곤혹스러운 것이다. 「아!」 기연의 입에서도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수완이 어쩔 줄 모르는 듯, 재빨리 서경에게 자켓을 집어 던진다. 그럼에도 녀석은 미동도 없다. 다만 살짝 내려 깐 긴 속눈썹 사이로, 누군가를 진하게 노려보고 있다. 도대체 뭘 저런 표정으로 열심히 야루는거지. 의아한 까닭에 눈길을 따라가자, 탄탄한 진우의 등이 보인다. 녀석도 좀 화가 나고 피곤한 것처럼 등을 돌리고 있었다. 기연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서경과 진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급기야 진우 녀석이 피로한 듯, 뒷목을 집으며 낮게 말했다. 「다음 주에 다음 씬 찍읍시다. 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경은 계속 진우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탭들이 기기를 챙겨 내려 갈 때까지, 눈물이 날만큼 서러운 표정으로 숨을 고를 뿐이다. 기연이 언뜻 진우를 지나치며 본 표정도 예사롭지 않다. 녀석은 뭔가를 쥐어 비틀 듯, 꽉 쥐고 있었는데, 성질이 잔뜩 난 것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다. 그렇게 숨막히듯 야한 얼굴의 서경도 처음 보았고, 이렇게 화가 난 듯한 진우도 처음 보았다. 1.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수완은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같은 반인 서경에게서는 그 문제가 더 눈에 띄게 드러났다. 기연은 서경보다는 나아 보인다. 「휴...」 서경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으며, 뒷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개 조용한 편인 고 3의 교실이지만, 그 순간 조수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주의를 줘야 할 것 같다. 그 놈의 키스씬 이후로 계속 이 모양인데, 아마 정사씬을 찍으면 더 심할 것 같아진다. 「..아.....」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빗어 넘긴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내는 소리지만, 그 순간 수완이 다 뜨끔하다. 대각선 방향으로 서 있는 서경을 향해, 수완이 무거운 시선으로 일어섰다. 점심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잠 와서..세수 한 거냐? 이..나쁜 새끼..요새 나한테 뭘 감추고 있는거야?」 이것은 둘이 친구가 된 이례로 지금까지..수년 동안 얼마나 많이 부른 말이던가. 틈만 나면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속을 터 놓고 지낸 것도 얼마나 긴 시간인가. 그런데도 문득 이 말을 하는 것이 극도로 긴장되는 수완이다. 살다 살다 이런 꼴은 처음 본다. 「응?」 아마 최근에는 자신이 하는 말도 잘 안 들리는 것 같다. 수완의 입장에서 보면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는 키스 씬 이후로 늘 이렇다. 수완도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이고 보면, 미성년자 관람불과의 동성애 코드 영화를 꽤 보았다. 프리스트, 프리실라, 벨벳 골드마인, 해피 투게더, 결혼 피로연, 왕의 춤..기타 등등. 그러니깐 이런 영화의 씬을 실제로 봤다는데 대해서, 혹은 동성애에 대해서 거의 편견이 없는 편이다. 그래도 이건 정도가 좀 심하다. 예를 들어.. 「뭐?」 그러니깐, 예를 들어 이렇게 쳐다보는 서경의 표정 말이다. 「세수는 집에 가서 해, 임마!!」 결국 잔소리나 하게 만드는 그 표정 말이다. 아마 뭔가 서로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끝내 입을 다물고 한숨만 쉬는 저 입술 말이다!! 서경이 흐느적 거리듯 자신을 비켜간다. 막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고, 그 보다 더 힘겨워 보이기도 하고.. 조금 창백해진 얼굴 위로 눈동자 만이 신비롭게 빛난다. 최근에 있던 그 색다른 공허감은 시선에서 많이 걷혀 있지만, 어쩐지 수완이 보기에도 가슴 철렁할 정도로 미묘하게 도발적이다. 「으응..알겠어...」 녀석은 요새 대답인지 흐느낌인지 모르게, 불분명한 소리를 낸다. 또한 나른하고 달콤한 시선으로 점점 물든다. 마구 졸라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앞을 쳐다본다. 어디서 저런 걸 배워왔을까.. 아아.. 정말 사람 이상하게 만든다. 이런 적은 없었다. 녀석이 약해 진 모습도, 혹은 방황하거나 겁 먹은 모습도 거의 본 적 없지만 마치 수년간의 친구가 없어지고, 어디서 교태같이 야릇한 한숨 쉬는 녀석만 남은 거다. 그것이 예사의 한숨이라면 괜찮지만, 꼭 뭔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다. 영화 때문에 숨겨진 본능이 드러나는 사람을 몇몇 보았다. 그래도 서경은 안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S is...아닌가! 때마침 친구들 몇이 수근거린다. 아마 그들의 난감함이란, 수완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젖어버린 머리카락에서 맑은 물기가 한 방울 뚝..하고 흘렀다. 어딘가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의 서경이었다. 그의 어깨 뒤로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셔츠의 깃 부분도 살짝 젖어있다. 아마 피곤하거나 잠이 와서 세수라도 한 것 같다. 시선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 쪽으로 내리깔려 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붉은 빛을 더 띠며 사내들의 끝없는 망상을 자극했다. 팔꿈치까지 둥둥 걸려 있는 셔츠를 접고, 녀석은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듯,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인다. 젖어 있는 긴 앞머리카락이 손등을 가리며, 녀석이 난감함을 드러냈다. 어딘가 새초롬하고, 또 어딘가 마음을 강하게 끌어 당긴다. 젖은 셔츠 탓에 나른한 몸이 더 부담스럽게 시선을 묶었다. 거 참 사내 녀석이 이뻐 보일 때도 있구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 서경이 달라 보인다니 정말 키스씬 때문인가. 설마. 어릴 때부터 친구인데, 저렇게 이뻐 보일 때도 있구나.. 서경아..너는 요새 무슨 생각을 하니 2. 기연은 편의점에 들어서는 진우를 보며 짧게 속으로 열을 헤아렸다. 녀석이 바나나 우유를 들고 와서 '디스 한 갑' 이라고 말할 때까지, 기연은 복잡하고 당황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서경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그렇지?」 담배를 내 놓지 않고, 침착하게 기연이 입을 열었다. 진우는 표정없이 자신을 노려본다. 목줄기가 타는 것 같았지만, 기연은 다시 확인하듯 입을 연다. 「서경이는 가만히 둬.」 진우가 그 순간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뺨에 뚜렷한 그림자를 만든다. 짙은 눈썹은 한 순간 일그러지고, 녀석은 귀찮다는 듯 교복 주머니에 넥타이 끝을 구겨 넣으며 지폐만 내밀었다. 「그 녀석은 나한테 중요해.」 굉장히 중요해. 내가 녀석의 순수함을 지켜 주고 싶을 만큼, 한 순간도 세상의 나쁜 면은 알리고 싶지 않을만큼.. 편견의 눈초리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만큼욕을 듣지 말았으면 하는 만큼.. 녀석이 믿는 ‘인간’이라는 것을 파괴하지 마. 「나한테는 안 그래요.」 갑자기 녀석이 씩 웃었다. 하얀 치아가 고르게 드러나는 호감가는 웃음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중요한 걸 깨달았다. 녀석은 절대 눈으로 웃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만 해.」 「선배는 무슨 핑계든, 말이든.. 둘러 댈 자격이 없어요.」 「아냐.」 매우 단호하게 기연은 녀석을 노려보았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서경을 가지고 노는 건 못 참겠다. 시나리오의 내용을 보건 데, 녀석은 분명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지나간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게 만든다. S is...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다. 서경에게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다. S is...는 자신의 이야기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석현'의 역은 바로 스스로의 행동이다. 그리고 서경이 맡은 '계수'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 한마디로 기연은 원조교제를 했고, 돈 때문에 같은 또래에게 팔린 경험이 있다. 그러나 내막은 진우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 스스로가 오해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서경까지 걸고 넘어지는 건 싫다. 마음이 없는 관계라는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서경과 녀석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서경의 눈동자를 보며 짐작할 뿐이다. 「담배나 주시죠?」 「나더러 이 서경을 좋아하냐고 물었지?」 전날..테니스 코트에서.. 아니, 사실은 물음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제서야, 진우는 조금 정색을 한다. 못마땅한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지만, 왠지 이런 진우는 딱 열 여덟로 느껴졌다.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너 같은 녀석에게 휘둘리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기연이 담배를 던지듯 건네며 이 사이로 거칠게 내뱉었다. 「...잘 들어, 김진우. 나는 너에게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지만.. 아마도 그 영화를 만든 니 속셈이 날 엿먹이기 위한 듯 하지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 「내가 아무리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이 서경은 내 친구야. 」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녀석이 눈살을 찌푸린다. 기연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는 다른 손님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지금까지는 견딜만 했지만, 승부는 지금부터다. 만약 녀석이 서경을 빌미로 뭔가 자신을 괴롭힐 수작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잘 몰랐던 탓이지만..너는 계속 나를 겨냥하고 싫어했다는 걸, 시나리오를 보면서 알았어. 그렇게 나를 사회적으로 까발리고 싶었나 본데.. ....김 진우..이 개 같은 새꺄.. 내가 어린 나이에 그 꼴을 겪으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된 게 있지.」 「...」 「너는 나랑 비슷한 종자야. 나처럼 스스로를 철두철미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능숙해..너는 그런 녀석이야. 그리고 나도 그래. 내가 이서경을 좋아한다구?」 그리고 기연이 팔짱을 낀다. 새로 들어온 손님이 음료수를 고르는 것이 언뜻 보였다. 「잘 맞췄어. 그리고 너 역시 그래. 너는 서경이와 내가 찍는 단순한 키스씬에서도 감정을 숨기지 못 해.」 「하-!..」 불쑥, 녀석이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던 손을 꺼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굉장히 화가 나거나 초조한 시선이다. 기연이라고 뭔가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떠 넘겨 본 말이다. 반응을 보고 판단할 심사였다. 애당초 서경을 끌어 들인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 거다. 그리고 마치 그 말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녀석의 눈동자가 점점 차갑게 변한다. 밝은 조명발 아래에서 표정없는 그 시선은 회색으로 느껴졌다. 「니가 나한테 이런 짓을 벌이고 있으니깐..나도 나름대로 방어를 해야겠지. 이 서경은 가만히 놔 둬. 그 녀석은.. ...내게 아주 중요해.」 「....」 「나는 이서경에게 커밍아웃 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만큼 지켜 줄 생각이야. 처음부터 녀석에 대해서는 내게 기회가 있었어. 아직도 마찬가지고너 따위에게 양보하거나, 상처 입히게 할 마음이 없어. 그러니깐.」 「....」 「너는 그 녀석과 같이 있기엔 너무 솔직해. 수작 부리지 말고, 깨끗이 넘겨.」 녀석이 담배를 바지 주머니에 넣자, 기연이 재빨리 잔돈을 계산했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짤랑이는 동전을 받으며, 진우는 단조로운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재미있네요.」 「-!!!!!!!!!.」 「나도 슬슬 질려가고 있었거든요. 이 서경과.. 천사가 되기에는 너무 음란하고.. 악마가 되기에는 너무 쓸데도 없어서요. 매력 없어요. 그런 인간. 가져요, 그럼.」 「-!!!!!!!!!!!!!!!!!」 그리고는 그대로 뒷걸음 치듯, 유유하게 편의점 문을 걸어 나갔다. 기연은 속으로 이를 몇 번이나 간다. 녀석이 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알아들었다. 녀석은 서경에게 음란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뭔가 비밀을 담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기연은 다가오는 다른 손님을 보지도 못하고 쿵-하고 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왜!!..어째서..!!저런 녀석과 싸움이 붙어 버렸냔 말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녀석과 이런 심리전에 말려 들었냔 말이다!!!! 3. S is...에는 둘이 달리는 장면이 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의지일 뿐이다. 거리를 달리고, 골목을 통과해서 건물을 올라간다. 옥상까지 달렸을 때, 서로 크게 호흡하며 응시한다. 그것이 오늘 촬영의 전부다. 서경은 달렸다. 기연도 달리고..아마 평생 그렇게 많은 달리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여학생들이 호기심 어리게 둘러싼다. 또래의 미소년들이니, 아마 그들의 눈길이 머물 만 하다. 서경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관심이 없었지만, 기연은 확실히 멋지다. 강하고 아름답다. 녀석이 긴 손목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옥상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건물은 무려 12층이나 된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서경아!」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음료수를 가져오던 기연이 크게 놀라며 외친다. 그도 그럴 것이, 서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12층 옥상의 난간에 걸터 앉은 것이다. 수완이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다. '내가 미쳐..'라고 그는 작게 말했다. 「저 녀석은 시소 높이도 무서워하던 녀석이라구!!! 도대체 요새 왜 저런데??」 기연이 차가운 커피를 챙겨서 다가서려는 순간, 옆에 있던 경숙이 유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밝힌데~ 어른들이 그랬어.」 기연이 그 순간, 발을 문득 멈춘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수완이 쳐다보았다. 경숙은 그냥 던진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하는 순간에, 진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수완은 그들 모두를 보았다. 셋 다..이상하다. 「서경이 선배 요새...」 경숙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며, 후배 중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바싹 내려앉은 녀석의 목소리가 애처롭다. 그도 최근의 새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 거다. 「...좀 그래요..」 녀석이 말끝을 얼버무린다. 뭐가 좀 그렇다는 건지 다 안다. 생각 있고, 눈 있으면 다 보인다. 「확실히 그렇지....」 수완이 날카롭게 기연과 서경을 동시에 둘러본다. 이뻐졌다는 거다. 뻔한 이야기다. 그게 그냥 이뻐지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표현하면 '물이 올랐다' 정도다. 서경이 노래를 부르는 건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건지..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채 붉은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발을 허공에 까닥거리는 녀석은 무섭지도 않아 보인다. 녀석의 하얀 셔츠가 바람에 마구 날렸다. 땀을 흠씬 젓은 그 머리카락들은 또 한번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거다. 진우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서경을 끌어들였던, 정말 잘된 캐스팅이다. 솔직히 영화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반신반의 했었는데.. 잘되다 못해, 너무 벅찬 캐스팅이다. 「이 서경....」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기연이 서경에게 음료수를 건넨다. 「따줘. 귀찮아.」 아마 피곤해서 그러려니..하고 생각하지만, 수완이 가볍게 얼굴을 굳혔다. 녀석은 기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시선을 뻐근하게 만드는 도발적인 얼굴로 12층 꼭대기에 걸터앉아 마음 놓고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아무도 못 알아듣게 뭔가를 중얼거린다. 「내가 널 여기서 밀어 버릴 수도 있어.」 기연이 이야기 하자, 서경이 그때서야 정색을 하고 돌아본다. 맑아보이는 눈동자 그대로 또렷이 응시한다. 「난 널 믿어. 유기연. 내가 여기서 떨어져도.. ...니가 슬퍼해 주겠지..저 놈의 수완이 새끼라도...」 혹시 몰랐는데, 요새 녀석이 마법을 배우나..라는 웃기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옷 자락이 마구 휘날린다. 그 때마다 새침한 생김새와 단아한 이마가 드러나서 수완은 쉽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누군가 짧게 기침한다. 그리고 사람들 몇몇이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 놈의 영화가 독이다. 「진우랑 무슨 일..있었냐..?...」 캔을 따주자, 서경이 벌컥이며 마셨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잘못하면 균형이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고개를 젖히자, 색기 가득한 목덜미가 펼쳐진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연이 날카롭고 낮게 물었다. 「없어..」 대답이 너무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이렇게 되면 정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정말..?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단호해서 차마 입도 안 떨어진다. 혹시 서경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 하는 게 전부다. 녀석은 뭔가 지독히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만큼 눈에 띄게 고혹적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단다. 의심은 가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망설이는 기연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서경이 벌떡 난간 위에 올라섰다. 「-!!」 늘씬하고 긴 다리가 금방이라도 아래로 추락할 것 같다. 「그 녀석은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고 했어.」 「???.」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기연이 긴장감으로 손을 내밀자, 서경이 비웃듯 시선을 살짝 돌렸다. .. 그 녀석.. 갑자기 서늘하게 기연의 등 뒤를 강타하는 짧은 깨달음. 그 녀석은 바로, 진우다. 지금 서경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살며시 노려보는 그 녀석. 속눈썹 사이로, 마치 유혹하는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를 정도로 깊게 쳐다보는 그 녀석. 진우 역시 얼굴이 잔뜩 굳어 있다. 김진우를 만난 이례, 기연은 저런 표정을 처음 봤다. 최근에 영화 때문에 좀 화가 났을 때도 녀석은 엄격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폭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차가웠다. 차갑고 차가워서 내내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눈동자였다. 그러나 지금 진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 굳은 표정으로 서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서 경숙이 뭐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진우의 얼굴은 금새 서경을 잡아먹을 듯 곤두 서 있었다. 좋든 싫든 뭔가 감정이 실려 있다.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녀석은 머리끝까지 폭발해서 서경을 패든지, 안든지 할 만큼 열기가 잔뜩 실린 시선이다. 저런 눈빛의 사내들을 몇 번 보았다. 집요하고 치밀하며, 또한 자신의 소유를 본능적으로 내세우는 살기 가까운 감정이다. 「-!!!!....」 기연이 손을 잡으며 녀석이 난간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그 순간, 자조적으로 그 순간 웃음을 터뜨린다. 크게 웃는 것도 아닌 짧고 메마른 웃음이다. 흡사 진우 녀석의 미소와 비슷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또 소름 끼친다. 「관계만 있고........진심은 없어. 그러니깐, 우린아무 일도 없었어.」 두근.. 기연의 심장이 또 좋지 못하게 두근거린다. 서경이 키스할 것처럼 얼굴을 붙이며 말한 것이다. 말의 내용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고..녀석의 난데없는 스킨 쉽에 신경이 쿵쿵거린다. 아마 비밀스럽게 말하느라, 얼굴을 가까이 했겠지만.. 그렇다고 내려오던 기세로 그대로 자신을 끌어안고 달뜬 숨소리로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안 그래도 최근에 시험받는 기분인데,이건 너무 아찔하다. 다른 녀석들은 정말 둘이 키스하는 줄 알 꺼다, 아마. 하지만, 기연의 머리 속은 다른 생각들이 오히려 요란했다. 이런 표정..이런 은밀한 목소리 어떤 절정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눈초리의 촉촉한 도발.. 피로감과 정사가 뒤범벅되어 있는 퇴폐적인 눈동자. 마치 새벽까지 누군가에게 진득하게 괴롭힘을 당한 듯한 엉망의 숨결.... ...어디서 배운 걸까. 이 서경. 4. 진우는 두번 생각하지 않고 받침대를 집어 들었다. 집으로 들어선 그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교복을 갈아입을 겨를도 전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카메라 삼각대를 들어 높게 집어 던졌다. 와장창- 그리고는 서늘한 손바닥을 이마에 올렸다. 빌어먹을 이 서경.. 정말 빌어먹을 이 서경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들며, 진우는 뭐든지 벽을 향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있으니, 안심해야 한다. 크게 기뻐할 생각은 없지만 잘난 척하며 즐겨야 한다. 그런대도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다. 진우는 자신이 감정을 잘 콘트롤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뭔가를 집어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그는 마음 놓고 부서뜨리며,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만다. 손등이 찢겨졌다. 피 냄새가 본능을 더 자극하는 밤이다. 약하게 만드는 것들은 하나도 소용없다. 세상은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진우는 이서경이든 뭐든 자신을 흔들리게 만드는 건 죄다 증오했다. 모욕을 주고 싶고, 그래서 파괴하려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대로만 살아 왔겠지 이 서경, 유 기연..이런 인간들은 늘 그렇게 살아 왔겠지.. 그렇다면, 서경이 원하는 건 하나도 해 줄 생각이 없다. 그는 전화를 들었다. 이제 마지막 보루가 남아있다. 한 지용이라고 언제나 이와 같은 일에 달려 올만한 사람이 하나 있다. 그를 불러야 한다. 5. 서경은 동아리 방으로 들어섰다. 아주 많이 생각하고, 아주 깊이 생각했다. 이 영화를 찍기 전에 진우와 말다툼을 할 때, 녀석이 그런 말을 한 게 문득 떠오른다. '사람이면 누구나 뒤틀어지고 기묘하게 괴리된 감정들을 안고 살아가요.' 이해했다. 비로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온 몸의 근육과 세포들이 아플 정도로 이해했다. 열이 나서 미칠 지경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면 어쩌지..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결국 그런 사람이다. 뒤틀리고 괴리된 감정을 안은 사람..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들을 마주보아야 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들을 만든 동화도 존재하지만, 어른들의 포르노도 존재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스럽고 더럽게 성을 인식하게 하는 세상이라서..그래서감정과 욕구가 더 비틀어진다. 서경 자신이 그랬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가 없어서, 그는 자신의 한숨이 날로 뜨거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머리 속을 빙빙 거리는 영상들과, 샛된 신음들..그리고 그 날 그렇게 허리 아래를 자극하던 적나라한 본성들. '만약 어떤 영화의 연기를 통해서 자신의 모르는 점을 발견하게 된 거라면 몰라도...' .. 라고 녀석은 또한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도 결국 옳았다. 망할 놈의 S is...는 결국 서경의 외설적인 유혹을 자꾸 밖으로 끄집어낸다. 앞으로 있을 정사 씬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서경은 일단 동아리방문을 열어 진우가 없는지 확인 한 후에 들어섰다. 안에는 수완이 앉아서 스토리 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경을 깊이 눌러 쓴 게, 어딘가 불만 어린 표정이다. 수완을 만나러 왔는데, 얼굴 보자마자 인상 찡그린다. 요새 자신을 보고 찌푸리는 녀석들이 많아졌다. 내 표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건 뭐야?」 떨떠름함에, 서경은 책상에 놓인 필름을 가리킨다. 누군가 필름을 걸어 놓고 나갔다. 언제 찍은 건지 알 수 없는 필름이다. 「어... ........한번도 안 봤냐? 점검할 게 있어서 빼 놓은 거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는지, 수완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돌려 봐도 돼?」 문득, 자신이 보지 못한 필름이 뭔지 궁금했다. 열중할 뭔가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은 가끔 쓸데없는 것들에 열중하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걸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음대로 해.」 보드 쪽의 스탠드를 키며, 수완이 말했다. 녀석, 얼굴은 불만 있어 보이지만 영화를 편히 보라는 일종의 배려다. 촤르륵 오래된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다. 필름의 시작은 그저 그랬다. 20 분 짜리 단편 다큐멘터리였다. 길거리의 수많은 노숙자들을 찍은 장면이 전부다. 지하철 안의 노숙자, 거리의 노숙자, 역 안의 노숙자..공원의 노숙자........ 영화는, 그것을 찍는 사람을 보여주진 않았다. 오로지 찍히는 대상만을 보여주었다. 가끔 짧게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며, 그러나 예상외로 그 영화는 서경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아저씨!..아저씨!! 영화를 찍는 어린 학생이 노숙자 아저씨의 등을 툭툭 친다.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나이든 그는, 학생과 카메라를 번갈아 쳐다본다. = 치워..절루 = 얼굴 가려드릴게요. 그런 식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찍는 사람은 시종일관 그들에게 말을 건다. 길거리와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맛없고 더러운 빵을 마구 씹는다. 설혹 서경 자신이 그 거리를 걸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몰랐을 터다. 그들 중 하나에게 촬영자가 물었다. = 왜 집에 안 들어가세요? = ...........가족들이 보고 싶어 질문에 대해서도 딴 말로 대답한다. 그러나 서경은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그들에게 '집'은 곧 '가족'이다. 질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집'이라는 단어가 들리면, 그들은 그리움을 떠올린다. 사회의 낙오자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상 생각할 줄 몰랐다. 자신과는 별개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자신처럼 체온이 있고, 느낌이 있고, 추억과 고통이 있고......... 그리고 가슴 절절히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서경에게 늘 '또 다른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필름이 돌아갈수록 저절로 서경은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 처음에야 성공해서 들어갈라구 나왔지 이렇게 병들어서뀉..돌아갈 수가 없어질 줄 몰랐어..... = 가족들이 그리워 할 거예요. 한눈에 보아도 아픈 것이 분명한 사람이 화면에 들어왔다. 그가 교복만 보이는 촬영자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 천천히 그 갈라 터진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 가족들의 짐이 될 거야 그 순간, 서경은 속이 울컥한다. 이런 말이 어디 있는가..누가 누군가의 짐이 된다니 아마 촬영을 하던 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카메라가 일순 흔들렸다. 핸드 헬드(handheld-* 카메라 등을 손에 들고 찍는 촬영기법. 흔들림이 강하지만, 그만큼 사실적인 효과를 낸다) 기법이다. 아마 그 이상의 것을 사용할 장비도 없었던 것 같다. 촬영하는 이가 조금 숨을 들이키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 아저씨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은 김진우의 목소리다. = 돌아가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아저씨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 ............ =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죠..그렇죠?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든지....그냥 기다리는 사람.... 한 사람 정도는 있어요. 이유도 상관없고,..질문도 필요없고.. 그냥 그 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요..누구에게나... 어머니가 그렇고아버지가 그렇고.. 부인이 그렇고, 아들이 그렇고..딸도 그래요. 주르륵 문득 맺힐 사이도 없이 눈물이 흘러 나온다. 서경은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울 정도면 그 신호가 뇌에 전달될 시간은 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이 흘러 내렸다. 「진우 녀석 꺼.....처음 봐?.」 문득 서경이 움직임도 없이 스크린을 응시하자, 수완이 조심스레 말을 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그냥 서경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마 우는 서경은 4살 이후로 처음 본 것이리라. 「따뜻하지?진우가 동아리에 들어올 때, 냈던 필름이야. 선배들이 아주 좋아했지.. 많이 뭉클했어.」 「.....그래」 그래..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렇게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녀석이 왜 그렇게 신랄하고 악랄하게 변했냔 말이지.. 왜 이 순간에 나는 뭉클하고도 화가 나는 걸까.. 「이 영화가 왜 따뜻한지 알아?」 서경이 목 메인 듯 수완을 쳐다보며 말한다. 왜 그런지 알아? 수완이 천천히 입을 뗀다. 「영화를... ..꾸미지 않았으니깐 .. 뭔지는 몰라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굉장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인데.. 이 카메라를 들고 이 영화를 찍는 진우 녀석은.. 적어도 그들을 절실하게 보는 것 같아.」 서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속에서 진우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에 언뜻 비취는 손목, 팔목, 그리고 다리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 돌아가세요 ......분명히.........필요하실 거 예요..... 눈물이 더 주르륵 흘렀다. 수완이 피식 웃으며 가만히 등을 토닥인다. 서경이 울자 난감해 하는 것 같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가만히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가 말했다. 「전날 녀석이 그렇게 화를 내도..다 이해가 되었던 건.. 다른 놈들에게는 몰라도,..진우 녀석에게는 영화가 전부야. 나는 진우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적어도 그 녀석은 영화를 자신이 표현하려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해. 난 솔직히 S is...가 무슨 영화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녀석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나보다 훨씬 나아. 녀석에게 영화라는 건..굉장히 절실한 표현이야..」 그래.. 서경은 왜 자신이 화가 날 정도로 울컥한 기분이지 깨달았다. 이런 것이 관계다. 뜨거운 갈증과 식도가 타 들어갈 만큼의 집요함 말고도 적어도 진우 녀석이 이 영화를 찍을 때 만큼의 절실함과 자신을 알려주려는 태도..그런 것이 관계다. 녀석은 서경에 대하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어떤 부모님과 어떤 친구들과 어떤 경험들로 자라왔는지.. 녀석이 보는 자신에 대한 모습은 일그러지고 흐트러진 욕구가 전부다. 또한 자신도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어떤 가족과 어떤 추억과 어떤 관계들로 살아왔는지 그런 게 그리운 거다. 숨이 멈출 만큼 격렬한 입맞춤보다도 더 필요했던 거다. 적어도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고, 그것을 미끼처럼 어쩔 수 없이 녀석에게 얽혀 들었더라도.. 관계란 그런 거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만큼의 따뜻함과.. 이렇게 영화를 찍을 만큼의 절실함이.. 이 필름의 단 20분 만이라도 서경에겐 필요했다. 그래서 더 울컥한 거다. 「-!!!!!!!!!!!」 마침내 깨달았다. 서경은 자신의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그 녀석이 필요하다. 증오든, 분노든, 혹은 녀석이 쥐고 있는 자신의 약점 때문이든, 튀어나온 본능 때문이든 그렇게 사람을 깊고 검게 응시하는 공허한 눈동자 때문이든.. 뭐 때문이든, 비어 버린 마음으로 차고 들어온 것이 온통 삐뚤어진 그 녀석이다. 어쩔 수 없는 경험과 애증 때문에라도 매일 같이 녀석을 떠올려야 한다. 영화가 그렇게 만들고, 그 경험들이 늘 잠을 뒤척이게 만든다. 그리운 거다. 그냥 한 순간이라도 격렬하게 연결되어 버린 두 사람의 관계에서.. 녀석의 안으로 꽁꽁 숨어버린 또래의 인간이 그리운 거다. 그 녀석 안에도 작은 인간이 숨겨져 있을까 서경이 어릴 때부터 늘 믿는, 마음 속의 사람 말이다.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지르고, 악하게 굴어도 언제나 마음 안에서 걸어 나오는 작고 착한 병정 말이다. 그런 게 숨어 있을까. 그래 필요한 거다. 녀석의 알 수 없는 속마음과 그 허공에 박혀 버린 공허한 시선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숨긴 채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은 거다. 김 진우를 저주하고, 분노하고, ..그 증오의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그래서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열은 관심과 필요로 변해 버린 거다. 한번만 저렇게 영화를 찍듯, 세상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으로.. 그 20분만의 시선으로라도 관계가 시작된다면 달라질텐데라는 서러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거다. 녀석이 필요했다. 1. 정사 씬이 있는 날 수완의 긴장감은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키스 씬마저 후유증이 절절하거늘정사씬은 거의 그에겐 과도한 실험정신이다. 영화는 많은 것을 또 한번 뒤 바꿔 놓는다. 적어도 수완의 시선으로 보기에, 아무런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세 사람이 S is...에 휘말려 버렸다. 지금까지 늘 여유롭고 따뜻하게 보였던 김 진우의 냉소적이고 차가운 시선을 보았고 지적이고 차분하면서 당당하던 유기연이 불현듯 초조해 보이기 시작했으며,.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이서경이다. 그 고지식할 정도로 보수적이던 태도와 앞 뒤 좀 막힌 고리타분한 태도가 허물어졌다. 반쯤 무너진 듯, 흐트러진 얼굴과, 숨결이 가장 문제다. 난데없이 고층 난간에 올라가기도 하고, 뜬금없이 눈물도 흘리며, 갑자기 사람 숨 막힐 정도로 몽롱하게 응시한다. 문제다. 정사 씬마저 찍고 나면, 이제 이서경은 이서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조용히 생각하러 애썼다. 뭔진 몰라도......아무튼 세 사람이 이 영화를 통해 계속 바뀌어 간다. 이 새끼들이, 친구와 선배인 조수완을 뭣같이 알아서 서로 아무 것도 말해주진 않지만,.. 가끔 진우는 서경을 이상하게 쏘아보고, 서경은 기연에게 묘하게 귓속말을 하며, 기연은 진우를 한 대 팰 것처럼 긴장해 있다. 「우우우우!」 그리고 수완은 흡사 짐승의 소리와 같은 이상한 절규를 내던진다. 머리를 움켜쥐고, 그는 고난에 빠진 수도사처럼 책상에 엎드린다. 뭐든지 좋다.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든 말든, 사이가 묘하게 변질되건 말건.. 그 이상한 영화 S is...가 사람을 셋이나 이상하게 만든다. 그것도 곧 있으면 정사 씬이 있는데 말이다!!! 이번 정사씬의 요점은 3자 대면이다. 그렇다. 배우가 한 명 더 오기로 되어 있다. 그것도 진우 녀석이 데리고 오는 배우가 말이다. 뉴 페이스의 등장도 수완의 위장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2. 그 날의 20분 처럼 그 따뜻한 시선. 그러나 서경은 아무리 녀석을 들여다보아도 그런 눈동자의 일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건 절대 해 주지 않을 놈이니하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저 녀석은 뭐야?」 서경이 아까부터 신경쓰는 것은, 진우 옆에서 웃으며 떠드는 기분 나쁜 공기다. 딱히 표정이 나쁘다든지 하기에는 사실 너무 이쁜 녀석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이고, 교복이 다른 것으로 보아 다른 학교 녀석이다. 「3자 대면.」 「응?」 예쁘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말 예쁜 녀석이다. 정말 직업 배우라고 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3자 대면 씬에 필요한 단역이야.」 「아...」 그 때서야 생각이 났다. S is...의 석현과 계수가 처음 사랑인지, 짐승의 뭔지를 모를 그런 이상한 관계를 나누던 때에, 석현의 다른 녀석이 찾아온다. 석현이 예전부터 만나오던 사람이라는 빌미다. 그는 딱 한번 출연하는데, 이 영화를 퇴폐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이 서경」 그리고 서경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데리고 온 녀석일까. 근방에서는 보기 힘들게 멋진데 늘씬한 교복이 어울린다. 서경은 기연과 비슷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면, 기연보다 좀 더 타락해 보인다는 정도지만..그래도 상관없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환한 빛나는 존재다. 「그만 좀 쳐다 봐, 이 서경.」 「나?」 「그래, 너. 진우 인지, 저 녀석인지..이제 그만 좀 처다 보라구.」 「아....응」 역시나 또렷하지 않게 대답하며 서경이 고개를 휙 돌린다. 그 재수없을 만큼 예쁜 녀석은 역시 웃어도 예쁘다. 실눈을 뜨고 웃는데, 정말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아름다운 외모다. 「저 녀석 이름은 지용이야.」 「뭐?」 기연이 아는 사람이었어? 질문을 던질 수 없을 만큼 잔뜩 흐려진 얼굴로 기연이 서경의 시선을 가로 막는다. 손바닥을 쫙 펴서 눈 앞에 가져다 댄 것이다. 「너무 잘 아는 놈이지.」 「..언제..」 기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그는 문제의 녀석과 진우에게서 등을 돌리며 툭 내던지듯 말했다. 「언제인지는 말 해 줄 수 없고..」 「-..」 「질 나쁜 녀석이라는 말만 해 줄 수 있어.」 서경은 갑자기 머리 속이 또다시 어지럽다. 질 나쁜. 문득 기연이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 같으면, 아마 같은 말을 들었을 때, '그래..후배들 삥 뜯고 패는 그런 질 나쁜 새끼 말이지' 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무엇보다 녀석은 서경 같은 쑥맥이 보아도 한 눈에 알 정도로 야스러운 생김새다. 어딘가 분명하지 않은 성(性)을 나타내듯, 연신 색기 있게 웃고 있다. 「나.나.. 물 좀 마시고 올게..」 저런 녀석과 한 화면에..그것도 낯 뜨겁고 초조한 정사 씬에서.. 모두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니, 와락 갈증이 밀려온다. 3. 서경이 물잔을 집어 드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난 여러가지 의미로 니가 싫어.」 달칵..물잔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진다. 서경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듯, 잠시 머뭇거린다. 눈 앞에 있는 녀석의 이름이 지용이라고 했다. 이쁘장한 입술을 비틀며, 녀석은 짜증난다는 듯 말한다. 「너 처럼, 연기력 좇도 없는 새끼가 영화에 나온다는 것도 짜증나고.. 그 영화가 광기 어린 김진우의 영화라는 것도 짜증나고..」 말문이 딱 막힌다. 이렇게 무작정 공격해대는 녀석은 처음 만났다. 생긴 것 답지 않게 성질 있는 놈이건 확실한데..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기가 막혔다. 화가 나기 보단 기가 막힌 거다. 서경은 침을 삼킨 채, 침착하게 말했다. 「난 니가 누군지도 몰라.」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서는 어떤 감정도 소용없어. 나도 최근에야 그걸 알았어. 「그래서 니가 재수없다고!!!!」 이 새끼가 말로 해선 안 되나..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저 '재수없다'는 말만 안 들었으면 좋겠다. 꼭 진우도 그렇게 이야기 한다. 뻑하면 재수없다고 이래 저래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이 왜 든 걸까. 서경은 머리를 흔들며 물잔을 다시 집는다. 그 순간, 지용이라는 이 여우같이 생긴 녀석이 더 빠르게 물컵을 집었다. 그리고 휙-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냉큼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느껴지는 것은, 매우 차갑다는 감각 뿐 이다. 「작작 좀 해, 한지용.」 물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진우 녀석이 마침 나타난 건 행운이지 불행인지 모른다. 서경은 물기 식도와 기도로 넘어간 물방울들에 기침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내가.물을 먹어야 할만큼 잘못한 게 도대체 뭐가 있지? 아아..씨바.. 도대체 뭐가 잘못 된 거야!!!! 지용이 싸하게 노려보더니, 말없이 동아리 방을 나간다. 서경은 그냥 어처구니없는 까닭에 진우와 녀석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본다.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위험한 감정이다. 저 새끼도 진우랑 관련 된거야? 진우 녀석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냐고...!!? 왜 녀석의 말을 고분 고분 따르며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거지? 씨바..내가 왜 거기까지 생각을 해야 하는거지? 「...제대로 닦고...」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털 듯, 탈탈거리자 진우가 마른 침을 갑자기 삼킨다. 만약 한마디만 더 말하면 서경은 폭발할 것만 같다. 영문을 몰라서 당하는 것도 한 두번이다. 「...물기 잘 털고..나와요」 그러나, 녀석은 조금 당황한 듯한 시선으로 문득 고개 돌린다. 어찌 녀석이 하기에는 너무 친절한 대사인 것 같아 속이 쓰린다. 「한지용이라구?저 새끼 걸리면 죽여 버린다 그래!」 간만에 이서경 다운 대사가 튀어 나왔다. 그래..이게 예전의 그의 말투다. 한방의 아연한 공격으로 제 자리를 찾은 서경스타일의 날카로움이다. 4. S is...의 정사씬은 외부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외설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말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벽에 기대며 서경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쩌면 물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며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다. 아아.. 살아 난 것이다 진우는 쓰게 웃었다. 말없이 모니터를 노려보며, 진우는 정말 쓴 위액이 겹쳐서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그 12층 난간에 바락 섰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저 참을 수 없는 건방진 이 서경이 살아난 것이다.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색스러운 모습으로..한결 주변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면서 말이다. 마치, 나 잡수세요..라는 듯한 얼굴이다. 언젠가 딱 한번 안아본 그 나른한 몸은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주체할 수 없이 젖어있다. 붉은 입술에서는 연방 못 참겠다는 듯한 거친 욕이 튀어 나오고, 그 바람에 스탭들이 바짝 긴장했다. 오직 지용만이 서경을 싸하게 노려보며 씩씩댄다. 「씬 24 action!.」 진우의 입에서 딱 부러진 한마디가 나오자, 서경이 기연과 함께 골목길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사람들의 인적이 거의 없는 오래된 공사장이다. 공사가 중단 된 까닭에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 이 장면에서 S is...의 두 녀석들은 도망쳐 나온 거다. 계수는 이미 다른 이에게 팔렸고, 그러나 막무가내로 석현은 계수를 샀다. 계수를 산 다른 녀석이 오기 전에 도망쳐서 도착한 것이 이 공사장 안이고, 그들은 여기서 첫 정사를 나눈다. 대사도 없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깊은 신음과 한숨이 전부이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몸의 동선과 움직임이 대사의 전부다. 그들은 말이 필요없다. 몸으로만 감정을 나눈다. 진우가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그게 전부다. 서경이 본능을 담고, 기연이 감정을 드러내면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는 씬이다. 더군다나 영화도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연에 대한 것도 효과적으로 까발릴 수 있다. 「....으응.....」 「!!!!!!!!!」 그러나 진우는 초반부터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옆에선 누가 짧게 탄식한다. 서경의 젖은 얼굴이 더 도드라지게 카메라에 담겼다. 하얀 얼굴에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의 젖은 향락을 부추긴다. 아주 짧은 찰나에, 진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눈을 돌리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서경이 기연을 끌어당기며, 목에 손을 건다. 입맞춤을 받아 넘기는 유연한 태도는, 기연 역시 당혹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혀와 혀가 얽히는 적나라한 장면에 스탭들이 침을 꿀꺽 삼킨다. 청바지를 입은 길고 보기 좋은 다리가 이전에 자신에게 그랬듯, 기연의 탄탄한 몸에 가 얽힌다. 「...아아..ㅇ....」 「.....!」 진우는 지금이야 말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 간다고 여겼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지, 혹은 쾌재를 불렀어야 했다. 그러나 짧은 교성 같은 비음이 서경에게서 흘러 나왔다. 이보다 더 깊을 수 없다는 듯, 기연이 서경의 뒷머리채를 끌어 당기며 도망가지 못하게 서둘고 있다. 숨이 막 가빠지기 시작했고, 붉어지기 시작하는 서경의 목덜미가 천천히 드러난다.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기연의 손 끝이 벌벌 떨렸다. 차락.. 반쯤 벗겨진 하얀 셔츠가 미끈한 서경의 나신 위에서 펄럭인다. 공개된 장소에서 유연하게 휘어지는 몸과, 연신 깊숙하게 퍼붓는 입맞춤들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질끈 그 때서야 진우는 손바닥으로 입을 감싼다. 자칫, 뭐라고 소리가 튀어 나올 뻔 했다. 그만!!! 교배의 열망으로 극에 달한 색기다. 그 열망을 눈동자에 담으며, 서경이 문득 카메라를 노려본다. 한 손으로는 기연의 목을 꽉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청바지 버클을 풀면서 목을 깨무는 행위에 작게 몸을 떨었다. 욱씬 아까보다 더한 통증이 몸을 방사형으로 뚫고 들어온다. 심장을 중심으로 욱씬거리는 징-하는 쇳소리다. 그것은 이내 두근거리는 박동을 따라 온 몸으로 치고 퍼진다. 세포들이 분열하기 시작했고, 이마의 앞 부분이 서늘하게 식어가며 머리 속이 울려댔다. 누구에게로 향 한 건지 분명한 눈동자가,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마치,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보는 진우를 비웃듯.. 눈동자 안에는 열을 담은 기연이 고스라니 드러났고, 홍채의 검은 윤곽이 교태롭게 웃고 있다. 서경은 물벼락을 맞은 복수를 하는 거다. 그는 앞 뒤 전후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것이 진우의 계획 때문이라고 판단 한 것 같다. 자신이 이용당한다고, 혹은 응징의 수단으로 쓰인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겠지만.. 안테나처럼 예민한 그의 신경은, 꼭 지금 할딱이는 그의 몸처럼 섬세한 것이다. 「컷!!!」 진우는 마침내 무의식적으로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에 휘둘러 외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군다나 잘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압도당한 마냥, 멍하게 입을 벌리고 선 것으로 보아,.. 이 장면은 그들의 생각과 상상 이상으로 감각적이고... 타락적이고..그리고 세기말적인 그 촉촉한 열망을 그대로 잘 담았다. 그리고 지용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애당초 지용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도 그 이유이다. 그러나 기연을 망가뜨리려는 의도와는 달리, 부서져 버린 것은 자신이다. 이 서경을 이 일에 사용한 자신에게, 욕설을 마구 내뿜었다. 긴장과 초조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다. 「하..」 뜨거운 한숨을 토하며, 열에 들뜬 시선으로 여전히 자신을 쏘아보는 서경이 보였다. 조금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우는 서경의 시선을 되받아 친다. 악마는 아담을 망치기 위해 이브를 이용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받아 먹은 이브가 거꾸로 악마를 유혹한 것이다. 문득 허리 아래로 발끈하게 내뿜는 욕구에 스스로 낭패감을 느끼며, 진우는 입술을 꽉 깨문다. 저 빌어먹을.. 천하에 아무 것도 모르는 재수없는 이브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을 저주했다. 나약한 스스로가 너무나 웃기기 시작했다. 5. 그런 이유로 해서,........ 촬영은 중단되었다. 김진우가 말없이 차갑게 등을 돌려 나가버렸고, 그가 아무런 사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의 촬영은 잠시 유보되었다. 서경은 수완과 저녁을 먹었다. 기연은 아마 문제의 그 지용이라는 인간을 데리고 어디론가 급히 사라진 듯 보였다. 「뭔가가 있어...」 수완이 스파게티를 둘둘 말며 말한다. 서경은 들리지 않는 듯 말없이 포크만 뒤적거릴 뿐이다. 옛날 같으면 먹을 걸로 장난친다고 한 대 때렸겠지만, 수완은 꾹 참았다. 「기연이랑, 그 지용이라는 녀석말야둘이 뭔가 있어. 둘이 이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어.」 「.....응.」 사실, 수완이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다. 도대체 너 요새 무슨 생각으로 살고..아니, 아까 씬에서는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다. 참 .. 뭐라고 말하기 힘들게 실감나는 연기였다..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모니터를 쏘아보며 반짝 치켜 뜬 그 눈초리 말이다. 살픗하게 열에 젖은 붉은 눈꼬리에 묘한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꼭 녀석의 내부에서 자신이 아닌 서경이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다. 심장이 다 벌렁거릴 정도다. 물에 젖어서 창백한 얼굴이 더 그랬다. 그러나 수완은 끝내 한 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괜찮냐?.」 「.....응.」 「그나 저나..진우 녀석은 이 시간에 충무로에 간다던데.....집으로 바로 가겠지? 너도 학교 안 들리고 집으로 갈 꺼냐?」 「.....응.」 「너, 너무 건성으로 대답하는 거 같지 않냐?」 「.....응.」 「이서경 개새끼」 「.....응.」 이 서경인간이 이상해 졌구나..드디어 계속 상태가 안 좋았는데, 완전히 맛이 갔군. 수완 자신은 결코 몰랐지만, S is...는 혹시 호러 영화가 아닐까? 마치 '엑소시스트'이라는 영화처럼,....,그 영화를 찍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저주가 내려서.... 다들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드는..그런................. 6. 서경은 늦은 시간에 동아리 방 분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조용한 안에서 옛날 필름들을 꺼내 하나 둘 보다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다. 그러면 내일 쯤엔 정말 원상 복귀해서 진우 녀석에게 따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 지용이라는 개 새끼가 왜 자신에게 물을 부었는지 말이다. 찰칵. 문고리를 돌리자, 조금 삐그덕 거리며 나무 소리를 낸다. 서경은 아무 생각없이 가방을 테이블 위로 휙 던졌고, 그리고 스위치를 찾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그리고 우뚝.. 사람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서 버린다. 자신 말고 둘이나 더 있다. 어스름한 어둠 안에서 그 조용한 장막을 찢듯 차차 망막이 길들여진다. 밝은 데 있다 들어와서 몰랐는데, 안에 있는 것은 분명 김진우다. 그리고 한 지용이다. 「너 여기서 무슨 짓이야...김 진우!!」 씩씩거리는 쪽은 여전히 한 지용이다. 그 이쁘장한 얼굴위로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다. 뭘 했는지 뻔하다. 진우 쪽은 상의를 벗고 있었고, 지용은 막 그 녀석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 쯤에 서경이 들어선 것이다. 지용은 욕을 퍼 부으며 진우의 무릎에서 일어선다. 「너는 항상 재수없어.」 그리고는 마치 침이라도 뱉을 듯,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진우 녀석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쉰다. 탄탄하고 군살없는 상반신이 잠시 들썩이다 가라앉았다. 그러니깐, 둘이 지금 뭘 했는지 이 방의 공기가 가르쳐준다. 습기 가득 배이고, 서경의 복부에 욱씬거리는 고통이 밀려들어올 만큼 적나라한 공기다. 갑자기 숨이 탁 멈췄다. 마치 온 방에 산소가 모자란 듯, 태어날 때부터 계속 해 온 호흡을 한다는 게 문득 너무나 힘겨워진다. 그 고통은 지용이 짜증 가득한 눈으로 방을 나갈 때까지 계속 되었다. 달칵.. 등 뒤에서 무겁게 닫히는 문 소리에 그때야 굳었던 몸이 풀려 온다. 손 끝부터 저릿한 감각 때문에 또 현기증 난다. 마음을 둔탁하게 때리는 찌릿한 고통이 계속된다. 서경은 눈을 크게 뜬 채, 진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상의를 챙겨 들며 목에서부터 천천히 입고 있었다. 지용이란 녀석은 기연과 간 줄 알았는데? 너 역시 필름 때문에 충무로에 간 줄 알았는데..?. 「왠 일로 이 시간에 여기까지 행차를?..」 아니, 그렇다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더러워..」 기분이........ 라고..말하려 그랬다. 그러나 녀석은 그 순간 싸늘하게 눈의 빛을 낸다. 아마,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게 분명하다. 자신의 기분이 더럽다는 이야기였는데.. 「아하..그래.. 선배는 얼마나 잘나서? 아까 촬영하는 걸 보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진 서경이었다. 그는 진우가 빙긋 웃으며 다가올 때까지 계속 허둥거리기 바쁠 뿐이다. 「아무래도 이제 남자가 궁해진 모양이네요, 선배님.」 「아앗..!」 몸 안에 열이 확 끼친다. 뒷 머리채를 확 잡아당기는 격렬한 손길에 놀란 것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녀석이 키스하듯 입을 가져다 붙인다. 그대로 그가 속삭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주인이 즐기는데 멋대로 들어오면 곤란하죠... 아무리 이쁜 애완동물이라도 그럴 땐 몇 대 맞아야 한다구요. 선배 때문에 또 다른 애완동물이 도망갔잖아요?」 그리고 쿵 서경은 바닥으로 던져졌다. 「벗어, 이 서경.」 ...마치, 이전의 몇 가지 악몽을 떠올리듯, 삭막한 목소리와 비틀어진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눈꺼풀 사이로 번쩍.. 섬광이 지나가듯, 고통이 스쳐가며 서경은 갑자기 질식할 것처럼 목이 졸린다.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픔이 아니라 어지러운 감각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힌다. 「발정이 극에 달한 거 같으니.. .. 교배 시켜 드릴까?」 「놔!!!...이 새꺄...」 「당연히 주인이 보는 앞에서 해야 겠네요. 내가 말했지...이 서경.」 「...놔..아악!!!」 찰싹.. 목이 졸리는 바람에 정신이 가물거렸다. 그런 서경의 뺨을 녀석이 몇 대 친다. 바둥거리던 몸은 그 거친 행위에 지배당한다. 가뜩이나 요새 열이 높은 몸이었다. 아무리 저항하려해도 맞붙은 체온 때문에 목이 타들어간다. 더군다나 녀석은 지금 화가 나 있다. 지용과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이유인 것 같다. 그 만큼 서경도 충격 받았다. 녀석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라도 이해하고 싶었는데, 녀석에게 자신은 그냥 화장실 같은 분출구다. 자신이 없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고, 그렇게 길들이면 그만이다. 아아...그래..이런 관계였지... 그 사실에 마음이 문득 찢겨질 것처럼 아파온다. 웃겨..이 서경..이라고 그 어지러운 머리 속으로 아무리 욕해도 소용없다. .. 아픈 건 아픈 거다. 길들여짐이 오직 그 이유다. 휙- 찢겨져 간 셔츠의 사이로 가슴이 드러났다.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유두를 잡아 비트는 행위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불쑥..그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행동에 욕구가 느껴졌다. 「나는 선배 같은 사람들을 잘 알아. 아주 위선적이지. 논리적으로는 무슨 설명을 못해? 이건 잘 됐네, 저건 잘못 됐네.. 하지만 도대체...」 「하아」 아마도... 아마도... 서경이 들어오기 이전에 즐기려 했음이 분명한 도구가 있었다. 서경은 녀석이 무엇을 집어 드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조금만 어루만져 주면 미친듯이 허리를 비틀지..」 「아........」 부드럽게 옷을 벗겨내며 녀석이 그렇지 않아도 열에 들 뜬 서경의 옆구리부터 입을 맞춘다. 손으로 입을 재빨리 가렸지만, 흐릿한 교성이 세어 나왔다. 촬영하기 이전부터..물 벼락을 맞기 이전부터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한 그 분노에서부터.... 이미 몸은 달아 올랐다. 「그리고 미친듯이 신음하고..」 「아윽...」 허벅지 사이에서 손이 옮겨진 채, 서경의 페니스를 감아 쥐었다. 마치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끼우는 듯한 자세로, 높게 들려진 다리가 녀석의 어깨에 걸린다.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음낭과 흔들리는 페니스를 왔다 갔다 하며 자극을 더한다. 너무나 부끄러운 자세 때문에 고개를 돌리자, 가차없이 녀석이 턱을 잡아 당긴다. 공기 속에 또다시 드러난 애널을 손가락으로 파고 들자, 불쑥 서경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르는 소리가 튀어 나온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굴복당하는 쾌감을 알아버렸다는 사실에.. 그래서 이 잔인한 녀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부끄러움과 수치가 약발보다 더 많이 환각을 불러온다는 사실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에 「아악!」 허리가 저절로 튕기듯 움직인다. 마치 암컷이 교접을 원하듯, 아래 위로 허리가 흔들린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낀 진우를 재촉하듯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다. 손가락 두개로 양쪽을 벌리듯, 애널의 주름을 흩으며, 녀석이 뜨거움 숨을 그 속에 불러 넣었다. 「선배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야. 이 곳으로 사내를 받아드리는 것」 「읏..」 목이 꺾인다. 뜨거운 내부가 움찔거린다. 흐느끼고 싶을 만큼, 말초신경이 뜯기는 자극이다. 「아아...」 진우는 낮게 탄성을 내질렀다. 손가락으로 이리 저리 내부를 휘젓다가, 물기 가득한 서경의 것을 움켜쥐며 혀로 낼름 핥았다. 「!!!!!」 잠시 몸이 수축하듯 떨렸다. 그 감각을 즐기는 것처럼, 내부에서는 더 녀석의 손가락으로 진동이 전해진다. 어디를 원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갈구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말 해 주고 싶어..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이 서경」 아마, 그 자신도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르는 듯한 난감한 표정으로 녀석이 말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녀석은, 온 몸이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는 서경을 향해 다른 것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 서경의 얼굴 위로 핏기가 싹 가셨다. 「이 색스럽고 야한 몸으로... .. 선배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안아 달라고 말해요. 선배의 여기로 유기연의 것을 만족시켜줘요.」 녀석이 손에 든 것이 보인다. 허리에 매는 벨트가 있고, 그 벨트의 등 쪽으로 길고 가는 끈이 달려 있었다. 끈의 아래 쪽에는 탁구공만한 볼이 달려 있었는데, 녀석은 서경의 손발을 묶고 그 벨트를 허리에 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조금전의 집요한 애무에 잔뜩 달아오른 애널에 그 볼(ball)을 확 밀어 넣었다. 서경이 외마디 소리를 지른 것과 동시에 녀석은 그 상태 그대로 일어선다. 「가장 부끄러운 자세로.........」 「아아....안......돼....아읏!...」 이질감과 저항감으로 뒤척일 때마다 더 깊이 들어온다. 내부에서 구르는 듯한 그 생생한 촉감이 이완하고 수축하는 은밀한 움직임에 따라 욕구를 증폭시켰다. 「가장. ........선배와 그 인간이 정신을 파괴할 수 있는 자세로. 가장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장소에서.」 「핫!....아하.. .. 말..도..안돼........개새끼 .....그 녀석은..........내 친구야.」 「아뇨. 돼요. 녀석이 오면, 나와 그가 똑똑히 보는 이 곳에서 선배의 몸 안에 들어간 이 것을 꺼내 보여야 해요.」 「웃..........기지..마. ...그 녀석은..........너와...달라...」 가엽도록 숨을 할딱이는 서경을 보며, 녀석이 차갑게 씩 웃었다. 아마도 가면을 씌운 듯한 미소다. 늘 몇 년이나 보아왔음에도, 미처 가면인지 몰랐던 그 미소다. 항상 부드럽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잔혹하고 비틀어졌는지 몰랐을 때의 미소다. 목적의식을 이미 상실한 파괴감만이 녀석에게 느껴진다. 그것은 광기다. 지용이 표현했듯이, 집요하고 차가우며 파괴적인 광기만이 남아 있다. 찰칵.. 계속 숨 쉬기도 버거운 서경이었다. 이내 목에 무엇인가 걸린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서경의 몸에 옷을 다시 입힌 채로, 비틀거리는 그를 일으켜 세운다. 몸 안의 볼(ball)은 끊임없이 내막을 자극하며 돌아다니고, 서경은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머리 속이 징-하고 울리는 아찔한 쾌감과 상처 입은 분노로 어지러웠다. 녀석의 가면을 벗기고 싶었는데.. 그 안에서 숨은 인간이 있다고 믿고 싶었는데 ........정신마저 한꺼번에 유린당하는 기분이다. 7. 아니.... 진우는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래..아니,..여기서 그만..... 기연이 일하는 편의점으로 전화했을 때, 이미 그 감정은 극에 달했다. 설명할 수도 있었다. 서경이 자신의 감정을 극단으로 항상 몰고 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헐레벌떡, 기연이 나타났다. 그들이 벌써 2년이나 걸쳐 서로를 쳐다보고 진득한 가면으로 속여 왔던 동아리 방으로 달려왔다. 친밀한 장소, 그리고 친밀하지만 서로 믿지 못할 관계.... 어디선가 희미하게 마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양 손이 뒤로 묶이고, 고통스러울 만큼 아찔한 성적 도구를 착용한 채 서경이 벽에 기대어 숨을 겨우 쉰다. 옷은 입고 있었지만,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그 야릇한 유혹은 자신의 최대 약점이 되고 말았다. 이서경이 유기연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무리들이라고 여겼는데, 「너!」 일단, 힘에 겨운 듯한 친구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 기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서경은 기연이 도착하자마자 겨우 떨리는 눈꺼풀을 올린 채 녀석의 어깨에 툭..하고 고개를 묻는다. 아마 서 있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서경이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 없다고 했잖아!!!!!!!!!!!!!!」 그래, 고백성사를 해라..유기연. 이 서경은 아직도 너를 심플하고 친절한 친구로 생각하는데.. 니가 얼마나 음란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는지..고백해야지..유기연.. 이 서경은 네가 친구라서 언제나 믿는다는데.. 아무 관계도 아닌 나보다야 훨씬 잘 해줘야지. 「이런.......좇 같은」 기연은 정말 분노하고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일단 서경을 근처 의자로 데려간다. 그런다고 앉힐 수는 없다. 유기연 정도의 경험있는 녀석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다. 서경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자극에 민감하다. 앉게 되면 더 깊이 들어오는 기구 때문에 모두를 타락시키고 말 것이다. 「원하는 게 뭐냐......김 진우...」 땀이 조금 흐르는 기연의 말끔한 이마를 바라보며 진우는 살짝 웃었다. 바르르.. 그러나 이 서경이 이 모습을 보지 않길 바란다. 늘 짓든 그 웃음인데도 어딘가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 가면의 웃음을..... 「기연이 선배가 서경이 선배를 안는 거요.」 그러자, 기연의 눈동자로 묘한 기운이 스쳐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너한테 남는 건?」 복수.. 그냥 정의로운 복수. 아무도 당신의 더러운 행동에 대해 파고들지 않았지만, 스스로 떠 안아야 할 죄책감. 당신도 똑같이 성을 돈 주고 사고 팔았는데, 교묘히 웃으며 잘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상처. 당신이 그 죄책감을 덮어 쓰면..나는 좀 편해질 것 같아서..그래서....... 「..으응」 그러자 조금 뒤척이며 짜증을 내듯, 서경이 신음했다. 예쁜 이마 위로 물기가 촉촉하다.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한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겨우 눈을 뜨며 진우를 노려본다. 두근.. 아아.. 그에게 증오를 받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미워하든, 증오하든..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서경은 약한 동물이고 자신이 아니더라도 강한 자에게 언젠가는 지배당할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순간에 위태롭게 마음이 흔들린다. 「김 진우」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해 보이던 선배..유기연. 그에 대한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얼마나 존경했었나..당신을 존경이 경멸로 변하고, 감성이 광기로 변질되기 전까지는. 「난, 이 서경 안지 않아. 못 안아.」 기연이 서경을 꽉 끌어 안았다. 그 손길마저 거추장스러운 듯 서경이 휙 뿌리친다. 누군가 건들이면 금방 튀어나올 촉촉한 열기 때문이다. 그러나 ...... 늘 그 건방지고 세상 모르는 당돌한 성깔로 자신을 기 막히게 했던 재수없는 이 서경이 입을 연다. 마치, 그 순간에도 자신은 괜찮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바득 바득 입을 열어 중얼거린다. 「.거...봐........... ......내 친구는......안..그.....래.」 두근 또 한번 현혹당한다. 자꾸 자신이 원하는 반대대로 되어 간다. 늘, 서경이 원하는 건 절대로 해 주지 않겠다고 나쁘게 말했는데, 그래야 기대심리라는 게 없어질 것 같아서......... 혹시나 자신에게 인간을 기대할까 봐 그에게 증오를 얻는 것은 별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망치려고 그 시나리오를 썼지?」 그건 내 이야기니깐......이라고 기연이 쓰게 덧붙인다. 그러자 서경이 그 순간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처음부터 이 서경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일에 말려 들었으니 너무 당연하다. 「내가 원조교제를 했고,.....그리고 같이 다른 사람을 원조교제 하는 어떤 녀석을 돈으로 샀지. 같이 도망가고공사장에서 처음 섹스하고. .. 다 맞아. 하긴 지용이가 다 말했을테니깐..」 「..-!!!!!」 그 순간, 정말 서경이 놀란 눈으로 자신과 기연을 번갈아 처다 본다. 그 눈동자에 서린 어떤 생소함에 갑자기 진우는 속이 따금거린다. 유리 조각들이 핏줄을 따라 흘러가는 기분이다. 기연이 고백을 하면, 서경이 상처 입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상처 입은 것이 아니라 그저 놀랜 듯한 얼굴이다. 「나와 지용이는 원조교제를 했어. 너는 나를 망치려고 그 이야기 그대로를 시나리오로 썼고.. .하지만.....」 「..... 」 「넌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나를 이해한거야. ......나를 망치고 싶었겠지만 그러기엔 넌 너무 영화에 재능이 있었어. S is...는 멋진 영화야. 너는 그 영화를 찍으면서 점점 더 나를 이해한거야...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러니, 니가 생각한 결과와는 점점 달라지는거야... 인정하진 않겠지만..너는 나를 이해하고 있고.. 또..이 녀석이 상처 받으면, 그 배로 상처 입는 건 너 자신이야.」 쿵 뭔가 강렬한 것이 뒷목을 때린다. 강하고 이 섬칫한 충격은 그가 이전에 결코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기분과는 조금 더 달랐다. 아니, 더 저릿하고 고통스러우며 말없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 그런 기분이다. 그래.. 그래서 난데없이 이서경에게 흔들리고 만 거다. 그냥 처음에는 귀찮기도 하고, 반응도 재미있고 해서 계속 괴롭힌 건데..문득, 빠져든 거다. 「김 진우」 「.........」 「너 자신을 망치려고 하지 마. 이서경을 이 일에 끌어 들이지 마. 난 서경이를 친구라고 생각해. 진짜 친구..말야.. 그 때 그렇게 말했던 건..너를 떠보려는 거였어. 물론.. 지금이라도 이서경이 내게 온다면 쌍수 들고 환영하지만 ....사람에겐 누구에게나.......자신만의 마지막 비상구가 있다고 생각해. .. 난 이미 그런 녀석을 만났어. ....사랑이든 아니든...........내게는 그 녀석이 탈출구야.」 「.........」 「너는 처음부터 서경이를 이용해서 날 끌어들일 생각이었겠지만.. 아마 그래서......내가 친구와 정사를 벌이고.. 그 죄책감과 자기 경멸로 망쳐지길 원했겠지만..」 쿵. 그리고 진우는 갑자기 허탈감과 허기가 밀려왔다. 그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버렸다. 결과는 너무나 허무하고 기가 막힌다. 유기연은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깔끔하게 영화와 자신을 모두 판단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계속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고, 자기를 속이는 대가만큼 상처받는 서경에게서 심장이 아렸다. 「잠깐만..」 그 와중에 문득 갈라진 서경이 마른 입술을 축인다. 갑자기 서늘한 감각이 진우의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다. 흡사 머리 속으로 금속성 망치가 두들겨지고, 속이 뒤엉키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이다. 맙소사.....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그 때 떠오른 것이다. 「누가.......누굴 이용해?」 안돼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한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아하」 짧고 마른 소리를 내며 서경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여전히 숨 쉬기 벅차 보이는 그는, 진우가 조금 전에 목에 걸어준 개 목걸이 비슷한 까만 띠를 두르고 있었다. 목에 딱 들러 붙고, 가운데 쇠고랑이 있어서 줄을 걸 수 있게 되어 있다. 「아..그래..이해했다. .. 그러니깐 니가 나를 이용했다고......... ............김진우?」 어떻게 그 상태에서 이성을 되찾았는지 도무지 짐작가지 않을 정도로 똑똑히 붉은 입술이 노기 어린 듯, 숨을 토한다. 질끈.. 그 순간, 진우의 가면이 또 한번 무너졌다. 「좋아.. ....그래..다 좋아..........내가 정리해 볼게」 아름다운 얼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담은 채, 진우의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러니깐,.. 내 절친한 친구 유기연은 동성애자라고 방금 커밍아웃했고 망할 새끼 김진우는 사디스트라고 커밍아웃 했단 말이지.......지금? .. 아..사디스트도 커밍아웃에 들어가나? 몰라..난 그런 거 이때까지 모르고 살았어.」 아아 진우는 저절로 뒷걸음쳤다. 분노가 눈에 이글거리는 그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또 유혹적이었으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도저히 손 댈 수 없을 만큼 한 순간 멀어졌다. 굉장히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 나긋한 몸에서 한꺼번에 분출되는 기운은 진우를 죄여오듯 압박한다. 「유기연이 원조교제를 했다고? ....남자랑?.....S is...에서처럼? 그래..뭐 암튼 그것도 그렇다고 쳐.」 「...서경아..있지.」 「닥치고 가만히 있어, 유기연. 넌 인간 말종이야..이 개새끼.. 할 게 없어서 그러고 사냐? 하지만 김진우보단 낫다.」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확 깨물며 서경이 문득 동아리 방에 걸려 있는 필름을 돌린다. 화락.. 진우는 징-하게 마음을 울려오는 통증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필름이다. 자신의 영화다. =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죠..그렇죠?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든지그냥 기다리는 사람은 한 사람 정도는 있어요. 이유도 상관없고,..질문도 필요없고.. 그냥 그 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요..누구에게나 어머니가 그렇고아버지가 그렇고.. 부인이 그렇고, 아들이 그렇고..딸도 그래요.= 「....니가 날 이용했어?.」 아주 위태로운 걸음으로 서경이 다가온다. 진우는 벽에 고정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향긋한 색정의 향이 온 몸에서 우러나오는 몸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그가 바로 턱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니가 나 이용했냐고..이 개새꺄!! ....유기연이랑 자라고?..아까 니가 말했던 것처럼? 니가 왜 기연이를 그렇게 부서뜨리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그것도 그렇다 쳐. .. 그럼...」 「.........」 「그럼..난 뭐냐..........이 새꺄..」 젖은 속눈썹 아래로 둥그런 눈동자가 물기 어린다.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고..사용하고.그런 것들이 그렇게 심하게 아플지 몰랐다. 심지어 그것을 추궁 당하는 것 자체도 이렇게 아픈 일인지 몰랐다. 「개새끼!!!!!!!!」 찰싹.. 진우는 얼얼할 정도로 얼굴을 맞았다. 아마 기연이 아니었으면, 아주 죽을 정도로 맞았을지도 모른다. 키나 덩치는 자신 쪽이 훨씬 크지만, 기연은 서경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틀리던 옳던 뭔가 주장하고 내세울 때, 결코 양보할 줄 몰랐다. 뭔가를 향한 그의 믿음은 늘 굉장했다. 그래서 .. 그 성격이 늘 짜증났고, 관심 갔다. 「하학..」 숨을 좀 고르던 서경이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이 따뜻했던 자신의 지난 날이 남아 있다. 「니가 조금은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어. 처음부터 남 괴롭히는 취미가 있다니깐 ....적어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하고 설득당하는 중이었어..」 「.........」 「.그런데............」 =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죠..그렇죠?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든지..... 그냥 기다리는 사람은.......누구에게나 한 사람 정도는 있어요. = 그건, 자신의 목소리다. 진우 스스로가 누군가 상처받은 사람에게 절실하게 건네던 그 위로다. 믿을 수 없다. 이 순간에 스스로의 목소리와 위로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니가 틀렸어......이 개새꺄!!!!!!!!!!!!!!!!!!!!!!」 주르륵 진우는 서경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애를 태우고 괴롭힐 때, 자주 글썽이며 애원하곤 했지만, 그건 본능을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일 만큼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주르륵.. 갑자기 자신의 시선을 꽉 채우는 아름답고 흥분한 얼굴이 물기로 가득 젖는다. 갑자기 뭉클..그 순간에 가슴이 아렸다. 서경이 왜 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이용당했다는 게 슬픈건지, 아니면 이렇게 되어 버린 모든 관계가 슬픈건지.. 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그의 생활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슬픔인지.. 「괴롭히면 쾌감을 느낀다구? ......괴롭힘 당하면......나도 쾌감을 느낀다구..?」 찰싹.. 서경의 얼굴로 손을 뻗는 순간, 매몰차게 손등을 후려친다. 웃..하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복부로 알싸하게 주먹도 꽂혔다.. 아그래..이 서경이.......원래 ..이렇지.. 「니가 틀렸어..이 개새끼..」 「서경아!!」 기연이 급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서경의 눈물은 참 무게가 무거워 보였다. 눈에 맺히지도 못하고 중력에 이끌려 저렇게 툭툭..떨어지다니......... 「내가 짐승이냐? 니가 길들이고 니가 원하는 만큼 아무에게나 안기게? 내가... .니눈에는 그런 동물이면 다야?.」 「............」 「그래..내가 다 인정해 줄게. 그래..아하.. .. 이렇게 질 나쁜 새디스트는 처음 본다.. .. 만족해?..이제?」 서경은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 쓸어 넘겼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폭발할 듯한 감정은 서러움 때문인지 지나친 상처 때문이지 막 물기로만 세어 나온 것이다. 정말 손을 뻗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가울 정도로 휙 등을 돌리는 서경에게 진우는 드디어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머리 속이 개운해 진다. 「너 새디스트라고 했지? 그래 잘 했어..그렇게 말했으면.... 이 정도로 사람 마음 파괴할 줄은 알아야지 잘했어..잘했어..아주 잘했어. 이름 값 하네.... 그래도.... .니가 틀렸어..이 개새꺄 ...하하하.. .. 쾌감이 없잖아, 쾌감이?.」 「..........」 「너는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해 주지 않겠다고 했지? 그것도 잘 했어. 그거야 말로 정말 지독한 상처야. 너는 .... 항상 내가 원하는 것에는 반대로 행동하니깐.... 하지만.... 난 달라..」 그 순간, 서경이 또렷하고 분명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툭툭.. 떨어지는 알싸한 눈물과는 너무나 다르게, 그는 이전에 늘 그랬듯이 턱을 치켜 들고.. 은밀한 눈꼬리를 치켜 세운 채 또박 또박 말했다. 「 난 니가 원하는 건 다 해줄게. 그게 내 방식이야. 내가 유기연하고 벗고 뒹구는 게 소원이라고?... 까지껏..뭐..어때....」 「....!!!」 서경이 진우의 팔꿈치를 끌며 나갈 때까지.. 그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보면서도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벽에서 아래로 무너져 내렸을 뿐이다. 불 붙는 듯한 눈동자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그 단아한 생김새만 허상처럼 남겨져 있다.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진우는 마음 어귀를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들긴다. 이전에 서경을 떠올릴 때마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이제 심장병 마냥 자리를 옮겨 가슴으로 이동한다. 울리고 싶다고... ........저 사람을 울리는데 모든지 다 걸 정도라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거짓말이다. 우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바람이 늑골을 통과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에는 그가 원하던 대로 되었는데.. 그는 결코 쾌감을 느낄 수도, 혹은 웃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 멍하니 서경이 틀어놓은 영화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 것도 없이 비어버렸다고 생각한 마음 어귀에, 자신이 외면하고 싶던 인간이 참 많이도 담겨 있었다. 주르륵 그 때서야 진우는 빈 방에서 눈물이 났다. 콧끝이 시큰거리고, 목이 메일 정도로 사람이 그리웠다. 내 안에 숨어 있던 깊은 사람을 꺼내어 준 서경에 대해........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게임에 끼워 놓고 부속품처럼 생각했던 그 사람에 대해.......... 진우는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유기연이 이서경을 바라보던 그 2년 전부터, 자신이 저주했던 건 스스로였다. 기연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웃는 서경이 가지고 싶었다. 그 난잡한 기연을 자신도 모르게 구해 낸 서경이.. .....진우는 자신에게도 서경이 필요하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외면했을 뿐이다. 결국 파괴된 것은 자신이었다. 기연이 서경을 안으리라는 생각에 잠긴 채, 진우는 약하게 신음을 내뱉는다. 질투다. 원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미련스럽게 남아 버린 인간에 대한 소유감.. ....그 질투다. 질투 때문에 속이 쓰려 미치겠고, 이렇게 만든 자신을 다시 저주한다. = 나는 너를...경멸해... ..라고 그가 말했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날이 지쳐가는 눈동자를 보며, 그 분노를 늘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우는 방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너와 그 녀석은 달라..너 따위와 내 친구는 달라!'라고 말하는.. 그 고집스러움 때문에 더더욱 파멸하는 쪽으로 자신은 삐딱해 졌다. 가면을 꺼내 쓰고, 그 앞에서 한번도 벗지 못했다. 한동안 주저 앉아 있던 그는 손을 가만히 들었다. 비어 있고, 항상 세상을 움켜쥐길 원했지만 세상으로부터 던져진 기분이 들던 그 손.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맞잡을 누군가도 가져 본 적 없는 그런 손. 그 때서야, 서경이 틀어 놓은 스크린 쪽으로 눈길이 갔다. 자신이 만든 영화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직전에 캠코더를 들고 만든 영화다. 진우의 키 보다 훨씬 크고 넓은 하얀 스크린에는 그 자신이 그 겨울에 찍었던 화면들이 돌아갔다. 마지막 1분은 수많은 거리 노숙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 중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캠코더를 들고 거리로 나갔던 것이다. 가만히 무릎을 일으킨 채로, 진우는 어두운 동아리 방의 밝은 스크린 앞으로 다가간다. 빛이 한 정점을 시작으로 쏟아져서 하얀 스크린 위에 빠르게 돌아가는 영상을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돌아간다. 그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손을 내밀었다. 진정으로 자신이 화해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스크린에 지는 사람의 그림자가 진우를 향해 마주 손을 내민다. 1. 수완은 더 이상 지쳤다. 이제 친구 녀석들 사이에서 진실을 알아내려는 노력에서 그는 과감히 포기했다. 일단 S is...가 정지됐다. 진우가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서경이 한 이틀 결석했다. 뭐가 어찌 되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영화를 찍겠다는 건지 아닌지.. 수완은 그저 조용히 기도했다. S is...의 악령이 자신을 덮치지 않길 말이다. 2. 「서경아!」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아주 짧은 시기가 있다. 절대로 이 여름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런 시기가 있다. 여름이 다가온다. 참..계절은 지치지도 않고 다가온다. 여름에는 겨울을 꿈꾼다. 겨울에는 여름을 꿈꾼다. 곁에 있을 때는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는데, 자신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여름을 즐긴다. 겨울에는 겨울을 즐긴다. 그 갈증 어리고 고통스런 시기가 끝나야지 계절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열 아홉의 서경은 이제 봄 날을 떠나 보낸다. 이제 여름을 즐겨야 하는 시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것이 이번 봄 날의 교훈이었다. 상처들 때문에 아직도 폐부가 욱씬거린다. 그러나 적절한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더 따끔한 상처를 느낀다. 변명을 하지 않는다는 건,..어찌보면 더 이상의 기회가 필요없다는 말이다. 「그 필름이 그렇게 좋아?」 서경이 동아리 방에서 늘 돌려보는 필름은 항상 진우의 것이다. 다들 S is...의 나머지 촬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 하지만, 진우는 한달 내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일주일만 더 빠지면 퇴학을 시키겠다고 학교는 경고했다. 관심없다. 어찌되든 다 지가 자초한 일이다. 털썩...기연이 커피 컵을 건네며 옆에 앉았다. 「지용이가 찾아왔어.」 「....?」 어디서나 건방을 떠는 것 같은 이쁜 얼굴이 털썩..서경의 옆에 앉았다. 서경은 녀석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서경을 볼 때마다 뭔가 끊임없이 욕을 내뱉는 이상 성격의 소유자다. 「그 녀석은 너를 좋아해.」 「.....관심없어.」 쿡..하고 짧게 지용이 웃었다. 지용은 동아리 방을 다시 자주 들락이기 시작한다. 무엇 때문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보나마나 , 진우 녀석 때문이겠지... 그 날도 진우와 저 녀석이 뭘 하려고 했는지 자신은 안다. 「그런데 왜 이 필름만 계속 돌려 봐?」 「....」 「그 날을 오해하진 마. 진우는 아무런 문제 없어. 내가 녀석을 꼬득이려고 한 일이야. 그 녀석..정말 냉정하잖아? 니가 들어오기 전까지, 끄떡도 없었어.」 관심없다. 서경이 대답없이 커피를 홀짝인다. 수완이 뒤에서 스틸을 정리하다가 뭐라고 궁지렁 거린다. 아직 수완에게는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잔뜩 쌓였다. 언제 말해 줄 수 있을건지 아직 모른다.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른다. 전혀 모르던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난 진우가 기연이에게 왜 그랬는지 알아.」 서경이 조용한 눈길로 지용의 입가를 처다 본다. 정말 이쁘구나..이 녀석은..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늘 그렇듯, 최근에 이 녀석을 볼 때마다 속에서 뭔가 잔뜩 뒤엉킨다. 그 날..이 녀석이 진우의 무릎에 앉아 있던 그 교태를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녀석이 중학교 일 학년이었을 때. 학교 선생이던 녀석의 아버지가......원조교제로 사회에서비판을 받았대.. 그것도 .동성의 제자랑.」 「..........?」 「녀석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어. ...근데....적어도 자신에게는 일어 날 수 없다고 생각한 일이 벌어지는 거야.....그럴 때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서경은 잠시 생각했다. 끄덕... 아마 자신만큼 그런 마음을 잘 이해할 사람은 없다. 충격이 크면, .마음은 공(空)이 된다. 완전히 비어 버린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했던 모든 사회적인 생각들이 깨끗이 걷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나 미련하든 아니든, 서경은 늘 사람을 믿어왔다. 「문제는 훨씬 더 커졌어. .. 아버지가 어린 제자랑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을 전한 게... 진우였던 거야.. 자기라는 죄책감이 컸던 것 같아. 물론, 모르고 어머니께 전한 것이겠지만... 어머니는 충격으로 거리를 뛰어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셨어. 그리고 아버지는.......」 「..........」 「녀석의 아버지가 거리를 헤매인다는 소문을 가끔 들었어. ..저 영화는.. 그러니깐, 이 서경 니가 보는 저 영화는 녀석이 유일하게 진심을 말하는 필름이야.」 찾고 있었구나..아버지를.......저 사람들의 틈에서....자꾸..매번.. .. 그래서 이렇게 늘 간절해 보이는구나 서경은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진다. 나약하다고 비웃어도 할 수 없다. 그 녀석의 파괴적인 광기 안에 스며 있던 작은 인간.. 따뜻하고 위로와 같았던 작은 인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서경이 너처럼 재수없는 새끼는 이해가 안 가겠지만.. 특히 자신의 실수로 모든 것이 갑자기 망쳐 졌을 때.. 사람은 대개 자신이 참 운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죽거나 다치고.. 진심으로 대할수록 상처 입는거지.. 그래서..보호막을 치는거야. .먼저 상처 입히면, 자신이 다치지 않을 꺼라고 생각해. 나는.누구보다 진우 녀석을 이해해. 그래서 너 같은 녀석에게 이런 말 하는 게 졸라 졸라 짜증나지만.. 녀석은 너를 좋아해. 자신이 좋아하면 니가 다치거나 없어질까봐.. 괴롭히는거야. 좋아하는 것들을 괴롭혀서....자신의 눈 앞에서 없어지거나 다치기 보다.. 스스로 떠나길 늘 바래...」 「......」 「나머지 이야기는 녀석한테 가서 들어.」 「.....?」 「그렇게 눈 치켜 뜨지 마, 재수없어. 녀석 좀 학교에 돌아가게 해 줘.」 또 투덜거리며 지용이 일어선다. 기연이 옆에서 피식거렸다. 이해하는 것이 하나 정도는 더 있다. 지용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기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말하는 내내, 기연만 늘 쳐다본다. 그것도 사실 좀 궁금해 졌다. 기연이 정말 돈 주고 지용을 샀을까? 3. 서경은 자신이 왜 찾아 왔는지 알고 있다. 잃어버린 단추 때문이었다. 벌컥문을 열던 진우가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선다. 차분히 자신을 노려보는 서경의 표정에 일순 긴장한 눈치다. 「선배..」 「닥치고 단추나 내 놔.」 그러나 두근.. 심장이 자신을 배반하고 울린다. 어떻게든 격렬하고 가슴 아프게 부딪쳤던 시간만큼, 이 녀석을 알고 싶다는 의지와.. 그리고 이 녀석이 자신을 이용해 먹었다는 상처가 동시에 온 몸을 억누른다. 「내 말 안 들려?!!!!! 단추 내 놔, 이 십새야!!!!!」 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피식마치 부드럽게 스쳐가는 표정으로 웃는다. 짧은 순간에 지나가는 안도 같은 미소였다. 여전한 서경을 보니 뭔가 안심했다는 듯한 웃음이다. 「미안해요.」 「단추나 내 ....놔..........웃기지 말고.」 「미안해요」 단추나 내 놓으란 말야, 이 개새꺄.. .. 서경은 짜증난다는 듯, 현관문을 발로 툭툭 친다. 녀석은 상의는 벗고 있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디론가 나가려던 기색이다. 「어떻게 말해도....」 「......」 서경은 급기야 툭..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 녀석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이 녀석은 나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 「넌 용서가 안 돼..김진우」 진우가 내리깔던 시선을 가만히 들어올린다. 새삼 이렇게 봐도 잘생긴 녀석이다. 그 무심하기만 하던 표정 위로, 이렇게 뭔가 지나갈 때마다 녀석에게 인간이 숨어 있다는 기대를 했다. 작은 인간 말이다. 강한 모습들 뒤에 항상 숨어 있는 작고 착한 인간. 녀석이 자조적인 한숨을 쉬더니 가만히 안으로 들어갔다. 서경은 문을 닫고 어느 새 본지 오랜만인 녀석의 아파트 내부를 둘러본다. 아무런 온기도 없는 그런 집..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무런 싸움도, 걱정도, 염려나 당부도 없는 텅 빈 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말이다. 「.....여기.....」 교복 단추 쯤이야 어찌되도 좋을 것을.. 사실, 집에 물어보면 엄마가 예비 단추를 챙겨 놨을 것을.. 그러나 서경은 고개를 처 들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왜 이 순간 기연이 했던 그 말이 자신을 파고들까.. = S is...의 주인공들이 이해가 가....걔네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했는데..=.....라던 그 말들.. 자기가 자신을 포기한다니..그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인가. 그런데도 이 녀석은 얼마나 자주 ..또 많이 스스로를 포기했을까. 상처를 타인에게 상처 입혀서 보상받으려는 건.......그 얼마나 자기 파멸적인 행위일까 「니가 달아, 이 개새꺄.....」 그 순간, 진우가 다시 놀란 듯 서경을 처다 본다. 니가 뜯었으니, 니가 달아야 할 거 아냐..뭘 그렇게 쳐다 봐? 이윽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단추를 달고 있는 녀석을 보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고르고 탄탄한 목덜미, 시원한 등..그리고 눈 아래 놓인 정수리. 금발의 머리, 한 쪽의 피어싱. 누군가를 이렇게 관찰한 적이 거의 없다. 생각해 보니 더욱 그렇다. 이 녀석은 자신을 다 봤지만, 자신은 이 녀석을 본 적이 없다. 작고 섬세한 바느질을 생각보다 잘 한다. 아마.. 내도록 혼자 있어야 했던 결과다. 바락.. 그 순간에 서경은 가슴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에 압도당했다. 마치 진한 잉크가 깨끗한 손수건에 천천히 확산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이 본능적으로 가끔 발바닥부터 천천히 뜨거워졌다. = 그 녀석은 널 좋아해.. =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파괴해야 할 만큼의 감정이라면 정말 그것을 가질 자격이 스스로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이 녀석은? 그것 역시 자기 파괴 아닐까.. 이 녀석은 정말 새디스트구나 자신을 파괴하는....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그 순간, 서경은 진우를 정말 이해했다. 문득, 심장의 가까운 쪽에 와 닿는 따뜻한 인간의 숨결을 느끼며.. 그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감미로운 움직임에 점점 깃들며.......... 심장과 가까운 쪽에 사람의 손가락이 있다는 건 정말 커다란 위로다. 녀석은 아무 말없이 단추를 달아주지만, 서경은 크게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 장소가 자신에게 주는 힘에 사로잡혔다. 가슴 안쪽으로 퍼져가는 체온과 더불어 습윤한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하나 하나.. 녀석의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 탄탄하게 뻗은 날렵한 쇄골과 넓은 등, 그리고 흐트러지듯, 자신에게 사로잡힌 듯.. 그런 표정으로 응시할 때의 그 딱 한번의 짙은 표정... 감미롭고 부드러운 손결, 격렬한 듯 하면서도 소리없는 입맞춤. 훅..하고 갑자기 서경이 숨을 들이 마쉰다. 4. 뭔가 조용해진 서경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진우는 고개를 잠깐 들었다. 실을 매듭지어 끊으면 다 끝난다. 물이나 한잔 마셔야겠다. 그런데, 문득 실을 끊고 일어서는 순간, 서경이 분명히 자신의 시선을 낚아챘다. 뭔가 부족한 마냥 조금 호흡이 가빠 보인다. 둥그렇게 말려 올라간 눈동자에는 은밀한 색기가 잔뜩 고여있다. 「-!!!!」 쿵.. .. 하고 진우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 서경이 한 쪽 손으로 셔츠 깃을 꽉 움켜쥐고 있다. 바르르 떠는 것이 저절로 느껴진다. 몸을 바싹 긴장시키는 듯한 이 묘한 기운은, 단박에 진우의 영혼을 낚아채며 허리 아래를 열기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는 조금 천천히 망연히 서 있는 서경에게 다가섰다. 아직도 동공의 둥근 테가 자신에게 놀란 마냥 떨리고 있었다. 살짝 가쁜 숨을 내쉬는 아랫입술은, 열이 밀려 나와서 발갛게 젖어있다. 조금 만 더 고개를 기울이면 입술이 닿을 것 같다. 지금까지 식으로 마치 훈련하고 교련시키듯, 서경을 향해 그저 자극의 수단으로 퍼붓는 키스가 아니라.. 어쩌면 진우 자신의 손마디도 살짝 긴장으로 떨리는 그런 입맞춤.. 그러나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걸 안다. 자신이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진우는 한달 동안 내도록 방에만 있었다. 죽어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고.. 왜 세상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늘 원하게 하는지 깊이 깊이 생각했다. 이상스럽게도..옛날과 같은 파괴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자신의 공허감과 영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고문과 같다. 자신은 서경에게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끝내 억제했지만,.. 언제나 한 밤의 열기로 치고 들어와 사내의 꿈을 난잡하게 만들어온 서경이다. 알고 있다. 자신이 손 대면 망쳐진다. 지금까지 그랬듯이..자신이 사랑하면 다 망쳐진다고 생각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이 다가온 진우를 향해 낮게 속삭인다. 붉게 물든 눈꼬리 역시 어쩔 수 없이 유혹적이다. 그러나 진우는 막막한 기분에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이 겪는 게 뭔지를 안다. 지금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딱 그대로다. 마음 놓고 이 사람을 괴롭힐 때 언제나 끄집어 내고 싶던 그 표정.. 어딘가 정처없이 헤매는 아이처럼 수치감과 혼란스러움으로 흐트러진 그 얼굴.. 조금만 더 괴롭히면 울음을 탁..터뜨릴 것 같은 그 매혹적인 혼돈. 몸에 열이 많아진 거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걸 잘 알고 있다. 진우는 입술을 꽉 깨물고 뻗어 나가려는 손을 굳게 쥔다. 주먹을 쥐며, 그는 속으로 열을 헤아렸다. 「,....괜찮아요......」 그리고 처음으로 김진우는 진심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왠지 이 순간에 아이처럼 울고 싶어진다. 잘 해주고 싶었는데.. 사실은...떠나간 당신들 모두.....그리고 남아 있는 당신들 모두..... 정말 정말 잘 해줄 수 있었는데......... 때론 장난스럽게..때론 따뜻하게..때론..격렬하게.. 「......괜찮아요..조금 있으면..선배...... .......괜찮아 질 거예요.」 낮고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에, 서경이 갑자기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그 날, 기연과 같이 자신을 떠나던 그 날처럼 그리고는 뚝,,, 서경은 정색을 하고 자신을 노려본다. 「개지랄 떨고 있네............ 니가............. 니가........해결해..이 개자식아..」 그리고는 갑자기 와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얀 셔츠가 펄럭이며 하나의 부드러운 공기처럼 와 안겼다. 양 손을 크게 벌리고 매달리듯 끌어 안겼다. 진우는 이번에야 말로 숨이 딱..끊어지는 기분이었다. 5. 부드럽게 휘어지며 작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으응.......」 길고 잘 뻗은 하얀 손가락이 미친 듯이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다. 마치 도망갈 듯 더 조르는 듯, 가쁜 숨소리로 진우를 몰아세웠다. 「아..읏.....」 그것은 왜 일까.. 아무래도 그냥 위로가 필요한 것 뿐이다. 세상에 상처 입었다고 생각한 진우가 아무에게라도 공격을 퍼붓고 싶었듯이.. 그런 진우에게 상처 입었다고 생각한 서경에게도 그저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얽히는 체온. 내부를 휘젓듯 강하게 밀려오는 격렬한 열기. 단지 지금은 그게 필요했을 뿐이다. 진우는 서경에게 굶주려 있고, 서경은 이 열기에 굶주려 있다. 세상은 이유모를 일들로 가끔 가득하고, 그것을 몸으로 나누는 게 서로의 방식일 뿐이다. 「아.........응.........아!아!」 크게 열린 하반신으로 진우의 것이 뿌리까지 들어온다. 충격적인 쾌감이 척추를 건드렸다. 서경을 엎드려 삽입한 채로 진우는 앞 쪽을 꽉 쥐었다. 이미 사정의 욕구는 한계에 도달한다. 내부 깊숙이 그의 것을 넣은 채, 서경은 정처 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꽉 맞물린 곳에서, 물기 스치는 야한 소리와 마찰열이 또 한번 반복된다. 「아응..........제발.........」 등에 키스를 퍼부으며, 한 손으로 사정을 막는 진우의 행동을 탓하듯 서경이 고개를 조금 돌린다. 온통 젖은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쪽을 향해 더욱 끌어당기자, 접합된 부분에서 공기 빠지듯 물 소리가 찰랑거렸다. 다시 쑥 하고 뽑자마자, 길들여진 몸이 힘껏 자신을 죄여온다. 「응..으응.............」 젖은 머리카락을 흔든다. 이대로는 참을 수 없다는 애원이다. 서러움처럼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진우는 말없이 그 턱을 잡아 당겼다. 이대로 그가 자신을 가득 담으리라는 걸 안다. 그의 내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담게 만들어 주고 싶다. 「좋아..........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묻는 진우를 향해, 서경이 낮게 욕설을 퍼붓는다. 「.......웃........기...지........마...씨발..... ...누가..너 따위.....에..게....」 「이래도?」 「....으ㅅ-!!!......」 허벅지 사이에 완력을 주고 힘차게 밀어 넣자, 서경이 비명을 지르며 목을 꺾었다. 원하는 곳을 강렬하게 누르는 압력 때문이다. 눈물이 글썽이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고집스럽고, 도도하고...사랑스럽다. 「아아......씨바..........」 고개를 흔들며 더 욕설을 던지는 서경이다. 그러나 진우는 매끄러운 그의 어깨를 깨물어 버린다. 얼굴이 확 돌려졌다. 돌려세운 얼굴에서 달아오른 입술... 그는 열기을 찾아 격렬하게 입 맞춘다. 뜨거운 손가락, 감미로운 표정, 열기 어린 몸, 용감한 눈동자... 진우는 자신이 그 모든 것에 입맞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렇게 진작에 하고 싶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핫!!...」 절정에 다다른 듯 복부가 잠시 꿈틀거리자, 흔들리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 침대에 놓인 두 손이 서로 얽혔다. 그리고 서로의 체액이 섞였다. 입에서 입으로, 내부에서 내부로, 손에서 손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어떤 이유로든 서로의 것으로 가득 차 올랐다. 마음을 말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내부로 서로를 담는 법은 이미 알게 되었다. 6. 서경은 단추가 다 달린 셔츠를 겨우 입었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린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녀석이 자기 것을 빼는 순간 진한 쾌락이 다시 몸을 떨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도 끝도 아니다. 이것 역시, 그냥 조금의 진심이 우러나온 관계였을 뿐이다. 「그 때 왜 울었어요?」 문득 녀석이 바지를 입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 녀석은 동정 같은 건 받기 싫어할 거다. 자신도 그러니깐 「니가 ..불쌍해서.....」 「................」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 니가 너무 불쌍해서.............」 녀석은 이제 등을 돌리지 않는다. 다만 좀 거리를 두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한다. 그 검은 눈동자..진지하고 짙은 눈동자에 이제 싸늘함이 한껏 가셔있다. 서로의 체온이 5도 이상 올라갔다. 그래..그래서 서로를 안고 싶었다. 5도 올라가도 그게 어딘가. 「그리고 나도 불쌍해서...」 「.................」 「니가 좋지도 않은데..계속 길들여지는 내가 불쌍해서.........」 순간,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번에는 서경이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휙..거칠게 넥타이를 맨다. 서로 한결 가벼워졌으니..이제 나도 도망가도 되겠지.. 너도 더 이상 내가 필요없을테고........... 「그리고 우리 둘다 불쌍해서.........」 「............」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러면서 껍데기만 엉켜 있었던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확.. 현관을 열면서 서경은 입술을 악 물고 소리쳤다. 「학교에는 정말 안 나올꺼야!!?!!」 「...학교는.. ....처음부터 다니기 싫었어요.」 「잘 됐네. 나도 너 같은 새끼 안 보면 속이 편하니......」 「사람들도 다 귀찮고.. 어차피.... 학교를 안 다녀도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래.. 너 같은 건 없는 게 서로 편한거야......」 마음에도 없는 말.. 어쩌면 이제는 녀석이 조금 그리울 것 같은 그런 마음.. 이제 열 여덟인데, 늘 혼자여야 하는 건 너무하다. 언제나 어른 인척 혼자 다 견뎌야 하는 건 정말 너무한 거다. 그러면서도 말한다. 너는 필요없는 존재라고..아무도 너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말인지 서경은,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잠시 혀를 깨물어 버렸다. 아니, 사실은 이제 네가 필요해졌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 그렇게 하면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까 봐. 아무런 진심을 아직도 보여주지 않는 네게...문득 열 아홉의 전부처럼 쏘아보고 있을 내가 두려워서...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한다는 것이 문득, 너무나 낯설고 낯간지러워서..... 1. 이틀 남았다. 이제 이틀 안에 녀석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퇴학이다. 기연이 편의점 금고를 열며 혀를 찼다. 지용이 왜 진우를 걱정하는지 안다. 지용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이다. 어제도 지용은 죽여서라도 끌고 오라고 길길이 날 뛰었다. 그러나 서경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기연은 알고 있다. 서경과 진우를 이어주던 끈은 자신이 전부였다. 아니, 진우 녀석이 서경과 이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택한 다리가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닮았다. 기연과 진우는 참 많이 닮아 있다. 달칵...편의점 문이 그 때 열렸다. 「오늘부터 너한테는 담배 안 팔기로 했다.」 일단 그래서인지 반가움이 먼저 든다. 잘은 모르지만, 서경이를 심하게 괴롭힌 거 같으니 매우 고민했지만 이 녀석도 상처 입었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때문에.... 조금 복잡한 얼굴로 진우가 가판 앞에 서 있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어딘가 미묘하게 감정이 교차하는 얼굴이다. 「난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어요..」 「니 덩치를 봐라. 넌 다 컸어. 거기서 더 크면 기분 나빠.」 기연이 아주 이전에 했던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학교에 돌아오면」 「.......」 「김진우..테니스를 가르쳐 줄게.. 그리고....아직.... 서경이도 남아 있잖아?」 얼마나 녀석을 좋아하는지 네 눈을 보면 알아. 언제나 자신을 죽인 듯 살아가는 니가..딱 감정을 담아 쳐다보는 게 두 가지 있지. 하나는 영화.. 하나는 이 서경 고집이 센 나이라고 생각해. 그건 나도.....그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지나갈꺼야.. 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는지는....꼭 지금 답을 찾아야 하는 게 아냐.. 나는그렇게 생각해.」 「네..... ........나는 스스로 여긴 것보다 참 어리다고 생각했어요..형..」 항상 진우는 이제까지 자신과 모든 사람을 '선배'라고만 불렀다. 아마, 그것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얼굴로 웃기만 하듯 그 가면 속에 가려진 자기만의 방어벽이다. 「가서..솔직히 말해..」 「........」 「이쁜 이 서경도 생긴 거 만큼 졸라 독해서 .......자기 마음 절대 이야기 못 해..」 녀석이 갑자기 피식 웃는다. 「...할 말이 없는 걸요.」 기연도 웃었다. 손님 없는 시간을 일부러 노려서 찾아온 게 뻔하다. 「진우야..」 기연은 몰래 담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마치 농구를 하듯, 녀석을 향해 던진다. 포물선을 그리며 담배가 떨어졌다. 녀석의 손바닥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사랑한다.」 「........!!」 남자 녀석들이 낯간지럽게 이런 말 잘 안 한다. 그런데도 기연은 말해 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이런 식으로 서로 아프지 않아도 좋았을까. 「할 말이 없으면, 가서 외롭다고라도 이야기 해.」 「...」 만약, 오래 전에 이렇게라도 이야기 했으면 녀석은 지금처럼 눈시울이 붉어질까. 왜 이 간단한 말을 그렇게 안 했을까..........모두들.......... 나만 유별난 인간인가. 「서경이가 가장 상처 입는 건.. 너와 그 녀석 사이에 아무런 진심이 없다는 거야.. .휘둘리고 길들여지는 관계에서...아무런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거야.. 필요한 건 니가 찾아..나를 사용하지 말고.. 녀석을 가지고 싶으면.... 너를 먼저 보여 줘야 해. 그게 규칙이야..」 이건 내가 알아.. 나 역시 그랬으니깐.. 너는 날 잘 몰랐지만,..우린 참 닮은 점이 많다..상대방의 마음을 잘 모르고 상처 입히는 점들 말야.. 너무나 한 가지만 생각하는 점들 말야.. 「알겠지? 그 녀석이 니 탈출구야. 탈출구는 사랑이 아닐 지도 몰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탈출구가 있고....」 니가 이전에 말했듯이그 필름에서 말했듯이.. 언제나 그런 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탈출구를 찾았으면....앞만 보고 뛰어. 그러면 바깥 세상을 만날 수 있어.」 영화 S is...에서 처럼 말야. 녀석이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 말하지 않지만, 가만히 바라보는 침착한 검은 눈동자에서, 기연은 따뜻하고 작은 인간을 보았다. 서경이 찾고 싶어하던.. 그 마음 안에 숨은 작은 병정. 그래서 이 녀석은 처음부터 서경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인간 이서경은 성질이 안 좋다는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는다. 마치 기연에게도 처음에 그러하듯 말이다. 그래서 기연의 마음 안에서도 작은 병정이 하나 뚜벅 뚜벅 걸어 나갔다. 아주 오래전에.......... 서경 자신은 그걸 모른다. 사실..그 오만한 성격으로 보건데, 어쩌면 그건 다행이다. 2. 서경은 한 숨을 쉰다. 그리고 또다시 습관처럼 동아리 방을 찾아 필름을 돌렸다. 알 수 있는 진심은 이 필름 밖에 없으니.. 나는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수완이 절래 절래 머리를 저으며 나간다. 밤 8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혼자서 낮게 한숨을 쉰다. 이제는 하도 많이 봐서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영상이 마음 아린다. 찾고 있는 게 있다면 더 힘을 내야지..왜 그렇게 방황만 하는 거야.......나쁜 자식 그러나 내일이 지나면 진우는 영영 없다. 어쩌다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서 서로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그냥 얼굴 붉히고 돌아가는 관계. 그게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아린다. 싸하고 무겁게 짓누른다. 뭔가를 기대했던 자신의 믿음이 천천히 깨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김진우라는 녀석이 원하는 마지막 가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푹....의자에 파 묻힌 채, 턱을 괸다. 멍하니 스크린만 보고 있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수완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서경은 시큰둥하게 입을 연다. 「나 심심해.」 그러자 등 뒤의 사람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김진우 이구요......」 「..-!!!!!!!!!.」 서경이 천천히 뒤 돌아 보는 순간, 녀석이 서 있었다. 한번도 보지 못한 검은 양복을 입고..작은 상자를 들고 있다. 「너!」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열 여덟입니다..」 이게 뭐야......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경이 뒷걸음친다. 뭔가 녀석의 진지한 표정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놀라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진우는 잠시 침을 삼키듯, 주저하며 천천히 낮게 속삭인다. 「나는 외동아들이구요」 「.........」 「제 혈액형은 B 형이고, 별자리는 전갈자리 입니다.」 그때, 뭔가 뭉클한 것이 서경을 파고든다.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서경은 곧 천천히 진정되어갔다. 녀석이 돌아왔다. 원하는 것을 알고 있던 녀석이.... .자신이 진실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이 녀석이.... 진실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돌아온 거다. 언제나 몸과 열기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관계.. 상처 입히고 상처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관계에서, 마치 녀석은 서경을 처음 보는 것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제가 열 네살 때 집을 나가셨구요.......어머니는 같은 열 네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서경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목소리가 갈라지는 진우 녀석이다. 「어느 날.... 아버지 앞으로 서류 봉투가 배달되어 왔는데. 아버지를 기다리기 귀찮았던 저는 어머니에게 그걸 건넸고.....」 「..... 「그 안에는 아버지가 어린 동성의 제자와 원조교제를 한다는 내용의 사진과..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뺏겼다고 여겼어요. 나는 ...불특정한 누군가를..........공격하지 않으면.. .. 고통스러워서 죽을지도 모른다고...생각했습니다.」 「....」 「다만....나는......」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진다.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사람들의 그 지독한 시선이 싫었고.. 날마다 혼자 있는 집을 찾아오는 기자들도 싫었고...... 무엇보다 그런 일의 원인이 된 내가 싫었습니다...」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 녀석은 지독히 아파보였다. 이 녀석이 이렇게 진심으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생생한 아픔인지, 서경은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물기로 젖는다. 진우는 마치 이를 악 물 듯 말했다. 「나는..... ........그냥외로웠습니다. 알고 계시죠?........」 「.........」 「학교에 나오기 싫다고 한 거..거짓말이에요. 집에서는 늘 교복을 입었다 벗었다 하고 있어요. 어떤 날엔.. ...가만히 교복을 입고 자리에 혼자 앉아 있어요... 아주 옛날에..엄마에게 밉다고 한 거..엄마가 필요없다고 말한거.. 그것도 ....다 거짓말이에요...왜냐면..... 난......지금도」 그래서 눈물난다. 말하면 너무 아파지게 될까봐....녀석은 한번도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못했던 것이다. 혼자서 다 견뎌야 하는데.....그렇게 강해지지 못할까봐 녀석은 두려웠던 것이다. 서경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그냥 녀석을 위해.. 이렇게 찾아와 준, 그 작고 용감한 꼬마 병정을 위해서......... 「난 지금도......엄마가 필요..해요.........」 그래 알아............. 「아버지를 이해 못하겠다고...저주한다고 말한 거.... 그것도 다 거짓말입니다... ..나에게는 아직도....그가 필요해요.. 이해하진 못했지만.....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를 속이기 시작했어요.....」 그래.. ..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그런다고 약해지는 게 아냐 서경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욱..하는 울음소리가 튀어 나올 것 같다. 「살아 남으려면 감정에 상관없이 다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있는 것들에 익숙해지고, .... 원하는 것을 잘 얻고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사실은... 친구들이 필요없다고 말한 거.. 그것도 다 거짓말이에요.. 선배나 형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도, 후배들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도... 사실...난.......... 난 정말 잘해주고 싶었거든요..」 녀석의 눈에서 투두둑 눈물이 흘러 나왔다. 저 키 크고 잘생기고 허우대 멀쩡한 강한 놈은..... 그러나 생각보다 더 많은 위로를 필요로 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 「그 사람을 안고 싶었는데.......」 「.....」 「한번만 안고..늘 나쁘게 대했습니다. ....만약 다시 그를 안으면....그가 더 많이 나를 경멸할까봐.. 내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내가 울고 싶어 하는 걸 알아차릴까 봐....」 서경은 가만히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 떨고 있구나 이 덩치 좋은 녀석이....마치, 내가 닿으면 자신이 어떻게라도 될까봐....정말 떨고 있구나 전율이 전해졌다. 그래.. 이 떨림을 들킬까 봐....혹시나 울컥해서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을 들킬까 봐........ 늘 너는 나를 뒤에서 안았구나...등만 보였던 거구나... 「나는 그 사람하고」 「.......」 「같이 엄마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가 너무 미워서.....그런 일의 원인이 된 내가 너무 싫어서.. 그리고 아직도 너무나 필요해서..... 나는 여태껏.. 엄마를 보내지 못했거든요........」 서경이 가만히 녀석의 손을 다독인다. 그래....손에 들고 있는 게 그거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너무 많이 흘렀다. 녀석은 어머니의 유골만을 가지고 지금까지 버텨온 거구나.... 「그리고 아버지도 찾아서.......」 「.........」 「엄마가 죽은 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한 걸......... 용서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다 등 돌려도......... 곁에 있고 싶다고 말 할 수 있게...........」 「.........」 「그런데....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내게 필요한 .....어떤 사람이.... ...저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말했거든요.. 아무도 내 빈자리를 모를 정도로..필요 없다고.... 그가 아는 다른 누군가들과 비슷하지도 않을 만큼....경멸한다고...」 「.........」 「............미안해요...서경이 선....배...」 녀석이 목을 살짝 뒤로 젖혔다. 아마 눈물 때문에 얼굴을 올려서 피하거나, 혹은 숨을 가다듬는 것이겠지.. 조금씩 떨고 있는 손을 꽉 잡는다. 서경은 가만히 자신보다 조금 큰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꼬리 끝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치켜 든 턱으로도, 그리고 조금 가까운 자신의 마음으로도. 이럴 땐 뭐라고 해 줘야 하나..아주 잠시..정말 잠시 고민했다. 서경은 눈을 꼭 감았고,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손끝을 느꼈다. 깊고 청명한 공기가 마음 깊숙히 찬찬히 스민다. 그는 잠시 숨을 돌린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이 서경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다.... 우리에게 지난 번까지의 만남은 없는 거다. 기억 안 난다. 나는 오늘 여기서 김진우라는 녀석을 처음 만났다. 녀석은 열 여덟이고, 전갈자리고, B 형이고, 진지하다. 「!!!....」 「나는 2남 2녀의 둘째 아들입니다.」 둥글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 망연한 눈동자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녀석에게서 도망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진짜의 이 녀석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다시 시작한다. 녀석은 열 여덟이고, 전갈자리고, B 형이고, 진지하다. 「나는 좀 재수없이 잘난 척 하기도 하고.. ..아는 것 쥐뿔 없지만 고집도 셉니다. 혈액형은 O 형이고, 별자리는 모릅니다.」 「..........」 「나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작고 착하고 용감한.....꼬마 병정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들은 건지..혼자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아무튼.. .. 늘 그렇게 믿었습니다.」 서경은 본능적으로 울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툭하고 금발의 머리가 서경의 어깨 위에 떨어진다. 셔츠위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그 축축하고 따뜻한 느낌이 너무나 벅차게 느껴진다. 아아..오늘 한 녀석을 처음 보았다....몇 번이나 다시 시작한다. .........녀석은 열 여덟이고, 전갈자리고, B 형이고, 진지하다. 「악마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 녀석은 새디스트입니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 「하지만...그 녀석의 영화가 좋았습니다. 진실어려 보였고....마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정말....좋았습니다... ....녀석은 내 마음을 자주 파괴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가면 같고, 그 영화 속의 그가 진짜 인 것 같았습니다. 물론..나를 괴롭힌 건... ...그건 아직도 용서가 안 됩니다..」 손으로 뒷목을 쓰다듬어 본다. 처음 느껴보는 짧은 머리카락의 파르르한 감촉이, 섬세한 손바닥 안으로 느껴진다. 서경은 웃으면서 울고 말았다. 녀석과 함께 있으며 이렇게 웃은 것은 최근에 거의 처음이다. 녀석은 열 여덟이고, 전갈자리고, B 형이고, 진지하며, 나를 가끔 웃고 울고 만든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녀석의 꼬마 병정에게, 내 꼬마 병정이 그렇게 크게 상처 입지 않았다고.. 그 정도는..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중요한 건..... ....내 믿음을 마지막까지 배신하진 않았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이고.... 사실은 정말 좋은 인간이라는 걸... ...믿어요.....」 「......」 「가끔... .....녀석이 아플 때는..그렇게 말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이 망할 놈의 세상이 너만 괴롭힌 거라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이 좇 같은 세상이 다 문제라고... 그러니깐 너는 괜찮다고....말 해 줄 수 있습니다. 녀석이 화가 날 때는 그렇게도 말 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웃기는 세상이 왜 너한테만 그러냐고..... 그래서 내 마음이 너보다 더 아프다고......내가 대신 화 내줄테니깐.... ..너는 괜찮다고.......」 씨바.... 괜찮아.. 다 괜찮아..곧 좋아질꺼야....라고.. 마치, 녀석이 영화 속에서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전할 수 있는 위로라서 그렇다고..... 「나는..이 서경입니다. 그리고 내일.. 그 녀석과 함께..... 녀석의 어머니를 배웅하러 갈 겁니다.」 「......」 「우리는 같이..」 「......」 「........ 강해졌으면.....좋겠습니다....」 「......」 「...그 녀석은, 내게 .. ............매우 필요하고 ..또 필요하고.. ...어쩌면 자꾸 필요하고.......그럴 지도 모를 존재..입니다. ....같이 걸어 나갔으면...좋겠습니다....」 이 서경 나이 열 아홉, 김 진우 나이 열 여덟. 그 때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관계의 본질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 어른들의 놀이가 끝났다. 서로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서로의 웃음을 처음 보았다. 서로의 이름을 처음 듣고... 서로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서로의 등을 처음 보았다. 서로의 날카로운 옆모습이나, 떠난 것이나, 떠나 온 것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얼굴을 묻을 어깨가 있다는 것도 역시 처음 알았다. 뜨거운 체온이나 숨결말고도,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은 더 많다는 것도 또 알았다. 그 때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오늘 정말 처음 만났다. 처음으로 하늘을 보고, 처음으로 사람들과 인사하며,.. 처음으로 단어를 배우고, 처음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참.. ...잘 된 일이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격정에 시달리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아파서 삐뚤어지더라도... 열 여덟의 비상구는 늘 우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턱을 치켜 들고... 탈출구를 발견하면 달릴 수 있는 거다. 숨이 찰 때도, 혹은 가슴이 뻐근할 때도... 그렇게 하다 보면 바깥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열 여덟의 우리는 가면 속에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서경다운 이서경과, 김진우다운 김진우를 처음 보았다. 1. 최근에 수완은 자신이 은밀하게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주했다. S is...는 촬영의 80%를 끝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아무튼 진우가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런데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기연도, 서경도..믿었던 진우마저도!!!! 옆에서 이쁘지만 마음에 안드는 지용이 아스크림을 먹으며 흐흥..거리고 웃는다. 이쁘니깐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사실, 남자가 보기엔 재수없게 생겼다. 서경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냥 이쁘장한 거지.....저 녀석처럼 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뭘 봐?」 그러면서 기도 안 차게, 지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쑥 내민다. 수완은 허찬 웃음을 내보이며 고개 돌렸다. 상대를 말자..상대를 말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시간에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이 녀석밖에 없다. 서경과 진우는 싸우고 있고, 기연은 뭐가 바쁜지 아직 촬영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S is...는 그 내용이 많이 바뀌어 있다. 「조수완..」 재수없는 지용이 옆에서 계속, 후흥거리며 웃는다. 이 녀석은 어찌 웃는 거 자체가 타인을 깔보는 것 같다. 정말 재수없다. 같은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짚신도 다 짝이 있는거야.」 뭐라고 하는 건가? 수완은 요새 자신을 멀리하려는 듯한 친구들과 이 녀석에게서 둘 다 괴리감을 느낀다. 이제는 녀석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행히, S is...의 악령은 지나갔고, 바뀐 건 거의 없다. 좋은 증거가 저기 있다. 서경은 또다시 진우와 싸우기 시작했다! 「난 아냐!」 아니긴, 또 뭐가 아냐.. 서경이 바락 소리를 지르자, 진우가 난감한 듯 부드럽게 웃는다. 아아..그렇다. 이것이야 말로 꿈에 그리던 아주 이전의 상황이다. 어느 날의 월요일이 오기 전의 상황... 수완은 흡사 스타워즈를 타고 과거로 회귀한 기분에 젖었다.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무튼, 난 아냐. 김진우. 이 장면에서 계수가 이렇게 튀어 나가는 건 너무 난해한 장면이야. 심사위원들도 이해 못한단 말야!」 「아하...」 답답하다는 듯, 진우가 담배를 빼문다. 「시험해 볼까요?」 느긋한 한 마디. 나른하고 부드러운 시선.. 그러자, 문득 서경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뭐 때문에 저러지..라고 수완은 머리만 긁적였다. 옆에서 계속 지용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 「아........괴롭힘의 미학이야...」 「....?.」 「니가 그러니깐 아직 애인이 없는 거다..조수완. 초등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들 치마 들추고, 고무줄 끊어 먹고, 머리 잡아당기고 .....울리고 난처하게 쳐다 볼 때, 얼마나 짜릿한지 경험한 적 없냐?」 도대체 그거하고 지금 풍경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서경이랑 진우랑 싸워서 촬영이 지연되고 있는데..징한 것들..얼굴만 보면 둘이 싸운다. 아주..S is...는 이제 이 서경의 영화가 다 됐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쓴 게 진우가 맞나... 그리고 서경은 그 동안 그러면 왜 잠잠했나..라는 의심이 마구 싹튼다. 「......」 수완이 아무런 댓구도 안 하자, 지용이 다시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며 쳐다 본다. 미치겠다,,,어서.. 기연이 와서 이 녀석을 떼 갔으면 좋겠다. 「넌 S is...에서 S 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갑자기 훅.. 얼굴에 불어오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향과 숨결에 당황했다. 그리고 S 라니.. 「모....모르긴!! .. 내가 왜 몰라!! Sex 의 약자잖아!!」 별 말 아닌 단어 하나 말하는데,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진다. 수완은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가 좀 컸나 보다. 서경과 진우가 그 전쟁 와중에도 이쪽을 돌아본다. 「어?」 그리고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보 아냐, 조수완?」 서경이 의기양양하게 그 거만한 미소를 띠며 소리친다. 「S is...에서 S 는 sadist 를 의미해!」 그러자 진우의 반문이 조금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 하세요?」 옆에서는 계속 지용이 정신 사납게 후훙 거린다. 「Sadist 는 무슨 S is...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다고.. 좀 격렬하긴 하지만....머 바보들....여기서 S 는 혹시 stone 아냐, 스톤? 돌 말야..돌 주인공들이 다 바보같잖아?」 그러면서 지용이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즐거워하냔 말이다. 더군다나 자기 씬도 없는데 왜 자꾸 나타나서 귀찮게 얼쩡거리나.. 「아아....」 그리고 진우가 난처한 듯 웃었다.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서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지는 기분이 든다. 이상하지만, 요새 수완이 느끼기에 그의 미소가 그렇다. 「선배들....왜 그래요... S is...에서 S 는....」 그러나 아무도 그 뒷말을 듣진 못했다. 2. 아참...나는...김 진우 입니다. 아직 서경이 선배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나는 이 서경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날 기연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끝까지 비밀입니다.... 4. S is...를 제출하면서 포스터 제작도 함께 들어갔다. 카피도 간단히 박고, 회색 모노톤의 두 주인공이 등을 맞대고 거리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등은 돌리고 있지만, 손은 마주 잡고 있다. 서경은 이 사진과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잠깐의 홍역처럼 뭔가가 굉장히 쓰라리고 강렬하게 지나갔지만, 지금은 괜찮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이해했으니 말이다. 서경은 흐믓하게 포스터를 들어 올렸다. 어서 어서 커서....어서 어서 강해져서... 같이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포스터에는 이런 광고 문구가 쓰여 있다. - 누구나 마음에는 꼬마 병정이 살고 있다. 사람들의 틈에서 지치고 차가워질 때, 자주 숨어 버리는 이 병정은 그렇지만, 탈출구를 만나면 재빨리 튀어 나와 세상 밖으로 달려간다. 용감한 꼬마 병정이 뚜벅 뚜벅 걸어 나와 사랑하는 다른 병정을 만났다. 어떤 사람에게도..반드시 이 정의롭고 용감한 꼬마 병정이 숨어 있다. - 추신 : ARS 추첨 'S is...'엔딩 이벤트. 제목 S is의 S 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정답을 맞추시는 분께는 작은 병정 인형을 드립니다! - fine - p.s 정말 짧게 적으려고 했는데!!...-_-;.. 또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더욱..자제 해야 겠습니다. 역시 S is...는 귀여운 녀석들 아닙니까?..(초롱 초롱..ㅜㅡ...) 초기에 밝혔듯이 가벼운 SM 입니다. 좀 색다른 글이 적고 싶은데,..그렇다고 아주 다른 것도 아닌..그런 글을 적고 싶었습니다. SM 이되..정말 조금 심각한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SM. 그래서 아직 어리고, 너무 계산적이거나...-_-;;...혹은 너무 피가 난무하고 눈물이 난무하는 그런 글이 아닌...그런 SM.. 협박이나 강간, (물론 위협은 있을 수 있겠지만....) 등등이 없는 SM...어리고...어린 관계...그러면서도 기본 포맷..그러니깐, 수를 괴롭히고, 공의 과거가 있고..하는 그런 포맷을 이상하게도 충실히 따르고 싶은 글. 사실..저는 하드한 글도 굉장히 좋아하지만...-_-;;...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프트한 쪽으로 글은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이..소프트의 기준은..-_-;..역시 제 나름대로 입니다..) 결과적으로...-_-;;; 역시 초반에 말씀드렸듯이..이것도, 저것도 아닌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헤..다음 번에는 더 강력한 게 있을 수 있는지 연구해 보겠습니다. ...^^;..S is...는 쉬어가는 페이지 입니다. 몇 번의 완결과 아직 완결이 남은 글들, 그리고 앞으로 쓰고 싶은 글들 사이의.. 쉬어가는 페이지입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가볍게 적었고,...읽어주시는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뻔한 스토리 라인일지 모르지만..^^;..언젠가 한번 지나가다가도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언제 삭제 될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 뭘 적고 싶은지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글을 하나 적어봤으니, 다른 글도 많이 적고 싶습니다. 이제 좀 전형화된 반유리식 캐릭터나 다른 것이 있다면 변화를 해 봐야 겠어요. 노력 중입니다만..^^;; 장르나 여러가지 면에서두요. 아참..-_-;..이 글이 설마 기연에 대한 진우의 복수극..그러니깐 ‘인어 아가씨’의 표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아니겠시겠지요...이 글에서 복수는 진우가 혼자 둘러 쓴 가면에 지나지 않습니다...헤헤...^^;..그걸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면 저의 필력 부족입니다. 그리고 둘째...-_-;;... 또한...설마..-!!..'S is...번외가 없지는 않겠지요...(..번외까지 또 혼자 즐거워하는 반유리...) 마지막으로 세째...-_-;;... 따뜻하세요오~~~..(^0^)/~